월간 lowkey-한거(閑居)-

2월: 빈 집

by 해보기

1.


그때 나는 분명 취하지 않았다.

순댓국집을 1차로 잡은 신입직원을 뭐라 할 수는 없는 속으로는 마냥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인사 발표가 나자마자 이 부서 저 부서에서 축하 전화가 쏟아졌다. 우리 팀원들은 자기가 승진한 것처럼 기뻐했고 난 모든 성과가 팀원들에게 있었음을, 그래서 나의 승진이 곧 여러분들의 도움 덕분임을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저녁 회식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근무한 지 19년, 동기들보다 앞서 승진하게 된 것은 몇 년 동안 남들이 힘들다고 기피하는 부서에서 묵묵히 야근하며 일하고 다른 부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아이들과 놀아줘야 할 주말에도 출근하여 사무실을 집처럼 일하며 보낸 대가이리라.

정신없이 업무 마무리를 하고는 야구장에서 승리한 팀이 집에 가면서 승리의 노래를 목청껏 외치는 개선장군의 모습처럼 팀 동료들과 함께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술을 안 마신 지 몇 개월 되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해서라도 마셔야 할 것 같은 음울한 기분이 들었다. 순댓국집은 항상 바닥이 질척거리던 광명시장통을 빠져나가 초등학교 후문 옆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큰길에서 도로 쪽으로 향하다 보면 허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시장 안 그 많은 순댓국집을 놔두고 왜 이곳을 단골로 삼으셨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어린 그 시절 순댓국 맛을 논할 정도도 아니었을뿐더러 지금 생각하면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아버지들이 그랬듯 젊어서 일에 치여 살았던 아버지는 나이 들어 본인이 서울 한 귀퉁이에 마련한 집 안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서성거렸고 그 서성거림에 맞게 우리 부자 역시 가끔 주말에 순댓국집에서 말없이 소주 한잔하고 집으로 향하는 그런 데면한 사이였던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아버지는 항상 앉으셨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에 제대로 닦아내지 않아 끈적거리는 이물감이 싫었지만, 우리를 보자마자 무표정함 속에 이제 할 일이 생겨 기쁘다는 표정을 짓던 주인 아주머니가 앉기도 전에 깍두기와 소주를 내오는 바람에 제대로 내색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별다른 특색이 없는, 하얀 시멘트 벽에 하물며 제대로 된 낙서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세트장 같은 식당이었다. 우리가 앉고 나면 남는 테이블은 3개 정도였으나, 채워져 있는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식당을 전세 내고 나를 편하게 먹게 하려 한 것처럼 내가 갔을 때는 항상 손님이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주문해 놓은 것처럼 음식을 빠르게 내놓았고, 그 속도는 아버지가 소주를 벌컥 들이마시는 느낌과 유사했다. 아버지는 글라스에 따라 드셨는데 노가다 식이라고 불렸던 그 행동에 익숙해지지 않아 의아하게 아버지를 바라보곤 했었다.

허름한 집 음식이 맛있다는 관념은 이 식당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순댓국은 맛있었다. 지금은 그 순댓국의 색깔과 냄새와 재료가 부연 국물처럼 흐려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말없이 소주 한잔하고 순댓국을 한 입 떠서 넣을 때의 쾌감이 가족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다들 잔 채우고 부장님 건배사로 다시 한번 축하의 잔을 비우겠습니다.”

가끔은 조용하고, 나서야 할 때는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박 과장이 또 분위기를 이끌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팀은 언제나 궂은 일 도맡아 하고, 이견들을 조정해서 업무가 진행되도록 만들어 주는 문제 해결반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여러 부서원과 등 돌리고 싸우고 강제해야 하는 스트레스 많은 곳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잘 돌보고 자리를 잘 지켜준 팀원들에게 존경을 담아 건배를 제의합니다. 위하여!”

30분도 안 되어 술병은 쌓여갔고 잔에 술을 남긴 직원들은 벌주까지 받으면서 급하게 취해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커지고 어느새 회사 이야기, 옆 팀 팀장의 버릇없이 우리 팀을 욕하는 이야기, 실적만 챙겨가려는 젊은 직원들 이야기 같은, 솔직히 내 자신이 아닌, 나는 잘 모르는 남 이야기에 난 조용히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회사에서 술 마시더라도 절대 강요는 하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놔두고 싶었다. 아니 내가 나에게 오늘은 마셔도 되잖아, 남들이 저렇게 축하해 주는데 고상 떨지말고... 음울한 목소리가 귀 옆을 간지럽혔다.


이번 승진 발표를 위해 성과를 준비하기 시작한 올해 봄부터 쌀쌀해진 몇 개월 전 초가을까지 긴장감과 피곤함, 형체 모를 두려움 등이 잠을 못 이루게 하여 퇴근 후 혼술을 많이 하게 되었다. 혼술이라고 해 봐야 맥주에 편의점에서 파는 샌드위치 아니면 김치찌개, 계란후라이 등을 돌아가며 먹었지만 어느 순간 보면 안주는 그대로 남아있고 술잔만 비워지고 있었고, 또 어느 순간 되면 나도 모르게 쓰러져 잠드는 일이 태반이었다. 한번은 혼술을 하다가 졸면서 식탁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인 이후, 아빠는 좋은 사람인데 술만 마시면 진상이 돼요 술 마시는 아빠는 없는 게 더 나아요 라고 말하던 둘째 초등학교 6학년 아들놈 얘기에 다시는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음울한 불안감은 수많은 변명거리와 함께 또 술잔을 들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야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치킨으로 조용히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가 또 잠이 들었나 보다. 갑자기 큰 소리에 잠이 깼지만 이미 내 안의 정체는 술 냄새가 역겨운지 내 몸 밖으로 탈출해 있을 때였다.

“빨리 좀 일어나 봐. 민서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이상해. 열도 심하고 응급실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괜찮아. 괜찮아. 나도 그렇고 다들 그렇지 뭐.”

“뭔 소리야. 정신 좀 차려봐. 딸이 아프다니까?”

“괜찮아. 괜찮아.”

이후 중학교 1학년이었던 첫째 딸은 아빠를 벌레 보듯 했고, 아침에 깨어나 응급실 다녀온 딸의 이야기를 일부러 별일 아니라는 듯이 먼 나라 소녀 이야기처럼 흘려 버리고는, 퍼즐 맞추듯 정체를 내 몸속으로 꽉 붙잡아 두며 다시 한번 집에서, 아이들 앞에서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약속이 오늘 깨지게 되었지만,,, 아이들도 승진한 아빠 이야기에 예외를 인정해 주리라...


어느새 술집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고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듯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기를 빨리는 것처럼 귀도 아프고 멍한 느낌에 이쪽 저쪽 부딪혀 오는 술잔 세던 것도 이제는 잊어 버리고 갑자기 피곤해졌다. 팀원들은 점점 밝아지고 활동량이 커져가는 반면 나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안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술만 마셔댔는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먹고 있음에도 계속 허기가 졌다. 뭔지 모를 허기와 함께 갑자기 19년 동안 회사를 다니고 오늘 승진까지 한 내가, 그게 나인지 껍데기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나이가 들어 술을 마실 때 어느 순간 내 행동에서 아버지가 떠오르곤 했다. 기억에도 없고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불쑥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닮은 나. 어느새 아버지를 따라 하고 있는 나. 닮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닮아 버린 유전의 힘. 특히 혼술할 때 많이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도 식사 중 술병을 들고 다니셨었다. 항상 반주를 드셨고, 항상 얼굴이 발그레하셨다. 뭐 딱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극한 상황처럼 술을 드시고 또 다른 자아나 막장 드라마같은 욕망이 나오시는 분은 아니었다. 어머니에게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그저 매 순간 술을 드시고 계신 기억만 남아 그 기억이 나를 만든 듯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었다. 아버지와 나의 차이를 굳이 들자면, 그 기억 속에 아버지는 술을 아껴 드셨다. 소주 한 병을 나누어서 점심에 반 병, 마개를 닫아 얼른 냉장고에 넣었다가 저녁에 나머지를 드시는 그런 약한 모습. 마시고 싶은 만큼의 술을 살 여유도 없으셨던 것일까 나를 키우시느라. 그에 비해 난 청출어람도 아니고 돈이 많지 않아도 막걸리 정도는 먹고 싶은 만큼 사 먹게 되었으니 그래서 그 옛날 아버지처럼 반 병 먹고 반 병을 남기는 그런 행동만큼은 따라 하지 않았다. 마시고 싶은데 돈이 없어 입맛만 다시며 아쉬운 느낌은, 지금의 나처럼 온 힘을 다해 술을 마셔대고 정신을 잃어 가는 느낌과 비해 나은 걸까?

아버지의 소원은 동사무소 여직원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내가 아버지와 순댓국집을 드나들게 된 때가 대학 1학년부터였으니 아버지는 순댓국집을 들어서면서도 속으로 내가 못마땅하셨을 거다. 그럼에도 항상 주말이면 싫어하는 나를 잡아끌고 술집으로 향하였으니 단지 술 상대가 필요했던 것일까 정말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원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순댓국... 어느 새벽 집에서 주무시다가 조용히 눈을 감으신 아버지를 마주했던 그때는 순댓국이 물론 생각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순댓국을 먹을 때마다 그 옛날 순댓국집과 이제는 내 옆에 없는 아버지가 함께 떠오르고는 했다. 그때는 아버지와 점심 먹으러 순댓국집으로 가던 그 시간이 귀찮고 피하고 싶기만 했었는데 그립고 아쉬운 시간이 되었다는 건 나도 이제 아버지가 되어서인가.


순댓국을 만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어. 그래서 언젠가부터 순댓국을 잘 먹지 않게 되었는데 이 얘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건 처음인 것만 같네. 신입직원이 들으면 미안해할지 모르니 모른 척하게. 나 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지? 지금 내 옆에 누가 앉아 있지?


2.


“2차 가시죠. 부장님.”

먼 우주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것만 같던 소리가 내 귀를 감쌌을 때야 그래 오늘은 좋은 날이지, 정신 차리고 술 안 마신 사람처럼 행동해야지, 멀쩡한 듯 일어나 계산을 하고 길거리로 나오니 추운 겨울 바람이 술기운을 날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때는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신입직원이 미리 잡아 놓은 호프집 앞에서 잠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생 하나뿐인 아들에게 해 준 게 없다며 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 오늘이라도 승진 자랑을 좀 해서 어머니 어깨에 힘 좀 들어가게 해야지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저 똑똑하고 머리 좋으신데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식 챙기느라 자신을 돌볼 수 없었던, 항상 자식들에게 미안함만 가지느라 본인 다리가 힘들어하는 건 못 느끼고 살아온 어머니 생각에 잠깐 우울해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이 생각 저 생각 이 감정 저 감정들이 머릿속을 막 내 허락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얻어맞고, 무시당하고, 딸 넷 낳고 무시당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제야 자신의 고귀했던 양반 가문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자식들을 위해 수시로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과 자식들을 아무도 못 건드리게 지키는 개가 되어버린 어머니...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신호음만 갈 뿐 연결이 되지 않는다. 조금 있다 집에 갈 때 다시 해 봐야겠다.

2차를 가자마자 박 과장을 포함한 중간급 관리자들의 신입직원 길들이기가 시작되었다. 2차부터는 내 승진 축하는 뒷전으로 밀린 듯하고 팀원들은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아 오늘을 즐겨볼까 술 취한 눈 같지 않게 본능적으로 먹잇감을 발견하고 조용히 잡아먹으려는 동물들처럼 반짝이는 카메라처럼 먹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살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옆에 그녀가 있었다.


지금은 10년 차 대리를 달고 있는 그녀가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그날, 나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신입직원 환영회라는 이름으로 골동품이 되어버린 트로피 같은 대야에 소주 한 병을 그대로 부어 원샷을 하고 난 뒤였다. 직장에 오기 전 치아 교정을 시작했다는 한 시골 신입직원은 치아가 알코올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하여 빨대를 이용하여 그대로 한 병을 내장으로 보내버리는 기술을 선보여 박수 갈채를 받았다. 이 트로피 같은 대야를 들어 올려 안에 내용물을 몸속에 쏟아 넣고 머리 위로 뒤집어 올려 툭툭 털어야만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받을 수 있었나 인정받고 싶었나 고조되고 시끄러운 그러나 머릿속은 무언가가 불같이 타오르고 흔들리고 고요하고 우주를 떠다니는 듯 꿈길을 걷는 듯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내 몸을 감싸던 그러한 순간, 테이블 몇 개 건너 그녀가 대야를 받아 들고는 몇 날 며칠을 준비하여 학예회 발표장에 나와서는 갑작스러운 조명과 시선들에 해야 할 몸짓을 잊어 버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엄마의 모습만을 찾는 유치원생처럼 눈을 약간 찌푸리고 도움을 요청하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술이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상형과 마주치는 것이다.

자세한 기억은 술이 가져가 버렸지만, 나는 선배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대야 속 소주 한 병을 원샷하고도 살아남아 그 이후에도 우월감으로 몇 잔의 술을 더 마셔댔고 그럼에도 그녀를 계속 살폈고 결국 그녀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더는 힘들다는 표정으로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을 때 내가 바래다줄게 그녀 옆에 서 있는 어색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색한. 그렇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특히 눈 속에 들어와 버린 그녀 앞에서 내가 바래다줄게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

2차까지 버티고 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지금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나 하나 분명한 건 나는 스스로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속으로는 쫄고 있지만 겉으로는 쿨한 척하는 것도 잘하고, 반대로 겉으로는 손발 음성 다 떨고 있지만 정신은 말짱히 응전의 태세를 갖추는 상황도 잘 만들곤 한다. 군대 이등병 시절 쳐다보기도 힘든 말년 병장 선임 한 명이 갑자기 나를 불러세우고는 말했다.

너 싸움 잘하지?

이병 김채성. 아닙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딱 보니 너는 싸움할 때 눈을 안 감아. 맞지?

순간 속으로 당황했다. 내가? 주먹이 내 면상으로 날아오는데도 눈을 안 감는다고? 내가?

너 같은 사람들이 절대 안쫄고 죽어라 덤비는 스타일이거든.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짐승처럼 말이야. 무섭다 너...

이병 김채성. 아닙니다.

뭔 개소리야? 난 태어나서 싸움이라고는 한 손가락 겨우 꼽을 정도? 그것도 어렸을 적 인생 모르고 자라던 시절에 누가 더 힘세네 내가 우리 반에서 몇 번째로 싸움 잘하네 자랑하며 다니던 코흘리개 시절 주변 친구들과의 전쟁이 끝인데... 새삼 누군가와 싸움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지는건,,, 나 스스로 굉장히 강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님 내가 모르는 전투적인 나의 모습을 만나고 싶은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색한, 그렇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특히 눈 속에 들어와 버린 그녀 앞에서 내가 바래다줄게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윗 사람들 이야기 잘 들어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또 아랫사람들 이야기 받아주며 버텨온 세월이 19년이다. 그런데 난 지금 누구지? 어색한 내가 어디에 앉아 있던가?


2차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다. 말없이 맥주잔을 들고는 그녀를 지그시, 가끔씩, 몰래,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 말고는... 술자리에서는 술 마시고 객기 부린 영웅담 이야기로 또 한 번 시끌하다. 대학교 신입생 때 MT가서 술 마시고 뻗어 누워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잠만 잤다는 이야기, 술집에서 술 마시다 너무 졸려 신발 벗고 양말 벗고 테이블 밑에 기어들어가 편안한 안방 침대처럼 잠들었다는 이야기, 새벽에 화장실을 찾지 못해 결국 옷장 옆 공간을 소변기로 확신하고 시원하게 처리했다는 영웅담 같은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영웅이 된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래 나도 한때 영웅이 되었었지.

결국 그날의 어색한 나는 술을 마셔서 얻어낸 용기로 그녀와 함께 택시에 올랐고 그녀 집 앞까지 가는 호사로움을 누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어색하지 않은 나와의 강렬한 첫 만남! 그 집 앞! 함께 있었던 시간에 주고받았던 대화, 느낌, 분위기는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름답게 퇴색되어 버린 첫 만남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술에게 고마워하고 그래서 술잔을 항상 함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등 떠밀어 영웅이 된 것처럼 불편한 자리가 이어지는 시간. 그럼에도 또 영웅 놀이에 빠져드는 쳇바퀴 같은 삶. 그걸 멈추기 위해 술을 마시고 어색한 나를 날려버리거나 그저 어색한 내가 항상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했다.


퍽!

갑자기 정신이 들었을 때 윗입술과 앞니 쪽에 강한 아픔이 느껴졌다. 살짝 앞니를 만져보니 흔들리며 피가 쏟아진다. 잠깐 넘어진 것도 같은데 다행히 다른 곳은 멀쩡한지 모든 아픔이 입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디에 부딪힌 거지. 잠깐 여기가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니 2차 호프집과는 좀 거리가 떨어진 하천 근처 골목 앞이었다. 앞쪽에 하천이 흐르고 있고 두 명이 같이 건너가기에는 조금은 좁은 듯한 다리가 바로 보였다. 하천이라 그런지 매서운 겨울 바람이 이를 더 시리게 했다. 어디로 가서 좀 씻고 싶은데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내 삶이 조금 나아질까. 아예 흔들리는 이를 뽑으면 좀 편해질까. 이제 승진도 아무 의미 없고, 내가 살아온 세상과 좀 거리를 두려면 이를 뽑으면 되는 걸까. 아 어머니에게 전화를 못 했네... 지금 이 상태로는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을 찾아 들어가 휴지를 사면서 앞니 상태를 확인해 보려다가 곧 마음을 접었다. 갑자기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못하는 건 나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눈 풀려 버린 내 눈을 내가 들여다보기가 민망해서이다. 술 마시다 자고 일어난 첫 느낌이 나에 대한 미안함이라면, 거울을 보며 나 자신을 민망해하는 것도 나 자신을 사랑해서인 거다. 갑자기 정말 집에 가고 싶어졌다.


3.


정처 없이 걷다 보니 그녀 집 앞이다. 순간 이 세상에 나만 남겨진 것처럼 골목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으스스한, 그리고 음울한 바람만이 내 곁을 떠돌고 있었다. 그녀의 집이 이렇게 가까웠던가 아니면 내가 머물던 안정된 공간을 순식간에 멀리 떠나온 것인가? 그녀는 집에 들어왔을까? 아니면 2차를 끝내고 3차까지 갔을까? 집 안 불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직도 술자리에서 술잔을 돌리고 있나 보다. 신입직원 때 술을 잘 못 마시던 그녀는 이제 술잔을 돌리고 술을 마구 섞고 그것도 모자라 신입직원에게 소주 한 병을 권하는 무서운 여전사가 되었다. 그래도 나에게 지금까지도 어색한 정체성이 있는 나를 만나게 해 준 몇 안 되는 고마운 친구라 항상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흐뭇했었다. 그녀의 집에 잠시만 쉬었다 갈 수 있을까? 근 10년을 함께 일해 왔는데 내가 누울 아주 작은 자리 하나 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집에 가고 싶은데 이젠 내 집이 여기인지 다른 곳인지 분간하지 못하겠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얼른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을 뿐이니 여기가 내 집이라고 내가 말하면 여기가 내 집이 되는 거라는 이성적인 판단이 들었다.


사실 10년 전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준 그날 이후 인생이, 내 자신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 챙기고, 한 회사 한 부서의 팀원 팀장으로서 회사 잘 다니고, 힘들면 조용히 술 마시며 어색하지 않은 나를 만나려고 했던 그 시간들... 오히려 티 내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사람처럼 조심했던 시간들이 더 많은가. 그 옛날 아버지가 식사 중 조용히 술병을 들고 눈치 보며 홀짝홀짝 반주를 드시던 그 시간처럼... 어쩌면 그녀의 빈 집 담을 내 힘으로 넘어가고 싶은 바로 오늘이 드라마틱한 첫날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이 훅 나를 감싸왔다. 조만간 내릴 것 같은 첫눈처럼...

그는 약간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고는 얕은 담을 넘어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입안에서 피는 멎은 것 같은데 앞니가 흔들리면서 피 냄새가 계속 코끝을 간지럽혔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걸 보니 더 추워지려나 보다. 눈이 올 것 같기도 하다.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그러나 담장 옆을 따라 조그마한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동백꽃, 크리스마스로즈, 팬지 같은 겨울 꽃들이 추위를 견디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꽃들을 좋아했던가? 꽃 옆에 누웠다가는 가지런함을 흩트려 버릴 것만 미안한 마음에 일부러 화분과 멀리 떨어진 반대편 출입구 옆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보았다. 춥기는 해도 피 냄새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저 꽃들이 나를 재워주려나? 그나저나 그녀는 언제 올까? 연락 없이 이 정도의 공간을 무단 점거했다고 화를 내지는 않겠지? 앉아 있는데도 몸이 휘청거리는 걸 보니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나 보다. 춥고 집에 가고 싶다. 여기가 집이었나. 아, 그러고 보니 어머니에게 전화를 못 했구나. 내일은 꼭 해야겠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새롭게 승진한, 성공한 나로 당당히 어깨 펴고 출근해야지. 양복입고 출근하는 내가 그게 나인지 껍데기인지는 똑같이 혼란스럽겠지만 뭐가 대수겠나.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더 당당한 아빠가 되면 그만이지. 그녀는 언제 오려나... 눈도 같이 오려나.


아내에게는 아니어도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아빠는 좋은 사람인데 술 마시는 아빠는 없는 게 더 나아요 라고 둘째 아들이 말하던 그때, 아니면 술 마시는 아빠 모습이 정말 싫다며 첫째 딸이 울먹이던 그때, 나를 좀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갑자기 내가 회사 생활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그 빈 집 앞을 그리워하고 술로 위로하던 그 시간들이 다 거짓처럼 다가왔다. 그건 그녀, 그녀의 빈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결국 그때의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색하지 않은 나. 내가 잘 모르는 내 속의 나.

그러나, 지금 나는 분명 취하지 않았다, 고 확신했다.


4.


“과장님, 승진 축하드립니다. 10년 반 만에 과장 진급은 요즘 회사 상황으로 보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뭐 성차별을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만 다른 남자 대리들 다 제치고 여자 대리들 중에서도 이번에 혼자 승진하신 것도 대단하고요. 최고입니다.”

“고마워. 다 우리 팀원들 덕분이라고 생각해.”

“자리 잘 지켜주고 언제나 궂은 일 도맡아 해줘서 내가 덕을 본 것 같네. 오늘 점심은 내가 쏠게.”

“막내 팀원님. 점심 식사 예약 좀 부탁할까?”

“네. 알겠습니다. 순댓국집 가시죠.”

“그런데 우리 팀에 이번에도 팀장 발령이 안 났네요.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조만간 다른 부장님이 오신다는 얘기도 들리는 것 같던데요.”

“우리 부장님도 계셨으면 과장님 승진 무척 좋아하셨을 텐데요.”

“그러게. 그렇게 갑자기 자리를 비우실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부장님이 과장님 많이 챙기셨잖아요. 은근히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고...”

“맞아요. 저는 어떻게 보면 부장님이 과장님에게 좀 의지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던데요.”

“부장님이 과장님 좋아하신 거 아니었어요?”

“뭔 소리야. 조금 부담되는 술자리가 몇 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 회사 들어와서 부장님한테 일 많이 배웠어.”

“그러고 보면 너무 술을 많이 드시기는 했어요.”

“술만 드시면 집에 간다, 나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셨는데...”

“맞아. 맞아요. 술주정 많이 받아드렸죠.”

“항상 어느새 보면 사라지고 안 계셨잖아.”

“그래 기억난다. 순댓국집도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좀 짠해. 많이 힘드셨을까.”

“부장 승진까지는 하고 그렇게 되셨으니 그래도 이 회사에 본인 이름 석 자는 남기신 거 아닌가요?”

“정체성 같은 거 아닐까요?”

“한 편의 스쳐 지나가는 영웅담인 거지 뭐. 그만하고 일들 합시다.”

“아무튼 과장님. 승진 축하드립니다.”

“그래. 다들 다시 한번 고마워. 힘내서 열심히들 가보자. 순댓국집은 예약된 거지?”


[해보기 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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