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 이야기

05. 비수(匕首)

by 해보기

며칠째 상대는 나오지 않고 있다. 어제도 전화 한 번 해봐야지 했다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느라 잊어버렸다. 특히 어제는 평소보다 더 심하기는 했다. 출근하자마자 줄줄이 잡히는 회의에 대응할 자료를 만들고는 점심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자리에서 대충 과자로 때우고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회의가 많으니 회의감이 자꾸 들어 근데 회의감은 자꾸 더 떨어져 킥킥킥.

오늘도 실장님은 아무도 웃어주지 않는 농담을 허공에 던지고는 혼자 웃어댄다. 나라도 좀 웃어줄걸 그랬나... 사실 웃기기도 한데... 집에 가면 생각나 낄낄거릴 수도 있는데... 웃어 주기엔 너무나도 빠르게 돌아가는 정신없는 하루였다. 집에 돌아와 대충 씻고 나니 벌써 12시를 넘어간다. 또다시 출근해야 하는 날이다. 아 오늘은 주말인가? 이런 생활도 25년이 넘어가니 그만하고도 싶은데 그만하고 싶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꺼내기만 해도 집사람은 화부터 내겠지. 아이들은 어느새 중학생이 되고, 돈 들어갈 일은 점점 많아지고, 그만큼 아내의 흰머리도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성북구청 옆 성북천으로 내려가서 달리기 시작한다. 하천 한쪽 방향은 자전거 도로와 인도가 있고, 다른 한쪽은 인도 전용 산책로로 되어 있다. 나는 항상 자전거 도로로 달린다. 자전거 전용 도로로 표시가 되어 있지만 사람이 걸어가도 불법은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들은 이후부터였다. 정말 불법이 아닌지는 검증해 보지 않았지만, 그 말을 그냥 믿고 싶었다. 자전거 도로로 달리고 있으면 쌩 달려 지나가는 자전거가 무섭다. 20킬로 속도 제한이 있지만 속도를 지키는 자전거는 없는 듯하다. 특히 똑같은 복장을 차려입고 무리를 지어 떼로 지나가는 크루원들은, 그중에 꼭 한 명 정도는 나에게 인도로 올라가라고 인상 쓰며 손짓을 한다. 내가 사람으로 보이나. 근데 나는 사실 인도로 달리며 사람들을 피해 달리는 게 더 무섭다. 사람이 자전거보다 더 무섭다. 그들은 쉴 새 없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 말이 무섭다. 그래서 달리는데 말이 듣기 싫어 오늘도 일부러 자전거 도로를 달린다.


상대도 나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상대는 반에서 키가 두 번째로 작아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나와 달리 중학교 때까지 씨름부에서 활동한 건장하고 덩치가 산 만한, 그러나 노는 아이들과는 약간 느낌이 다른 학생이었다. 어느 날 반 친구 한 명을괴롭히고 있는 소위 일진에게 다가가 얘 말고 나를 때리라며 맨몸으로 뚜벅 서서 일진을 노려보던 상대. 소문은 삽시간에 전교로 퍼져나갔고 그 이후로 상대는 학교에서 우상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 상대가 어느 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니 혹시 나한테 공부하는 법 좀 알려줄 수 있나?

내가? 어떤 과목을?

의아하면서도 약간은 두려워하며 떨지는 말자,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상대는 조용조용 다시 말을 붙여 왔다.

내가 중학교 때 공부를 하나도 못 했다. 이제 해 볼까 하는데 뭔 말이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려줘.

그리하여 상대와 나는 소위 친구가 되었다. 기초가 될 만한 내용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주면 상대는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간에 무조건 외우고 봤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같이 나와 떡볶이를 먹고 헤어지기도 했지만, 거의 매일 그냥 조용히 다른 친구들을 피해 걷는 날이 많았다.

난 씨름을 그만둔 이후로 사람들 마주치는 게 싫다. 괜히 선배들 만나면 인사하고 아는 체하는 것도 싫고, 또 씨름 좀 했다는 이유로 운동선수 취급하는 사람들도 싫고... 나도 너처럼 그냥 무던했으면 싶다.

내가 무던해 보여? 나도 사람들 피해 다닌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난 사람들 많은 데 있으면 오히려 혼자가 된 듯 외롭더라구...

그렇게 친구가 되었던 상대와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나는 대학을 갔고 상대는 동네 근처 전문대를 갔지만 곧 자퇴하고 지물포를 하시는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배운다고 했던 때가 거의 마지막 연락이었다.


성북천을 남쪽 방향으로 3킬로 정도 달려가면 동서로 나 있는 청계천이 나온다. 청계천과 만나는 지점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어느 쪽으로 달려갈지를 고민한다. 지금 시간이 새벽 6시 반. 기온은 10도로 날이 많이 풀려 장갑은 끼지 않아도 될 정도다. 벚꽃도 이제 곧 만개하겠네. 조금만 지나면 사람들이 우르르 산책하겠다고 몰려나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자전거 도로로 몸을 피한다. 오늘은 이른 새벽이니만큼 청계천 서쪽 도심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청계천에는 인도만 있다. 그래서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이 아니면 사람들에 치여 달리기가 어렵다. 지금도 산책하는 어르신들이 몇 분 계시지만 이 정도쯤은 피해 갈 수 있다. 힘들어도 새벽 일찍 달리기를 하러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인도를 편하게 달릴 수 있는 여유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매번 생각한다. 내가 언제 도심 속 청계천을 이렇게 달려볼 수 있겠나.

4월의 청계천 새벽은, 특히 주말 새벽에는 도심 속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차 소리도 별로 없고 말 소리도 없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도심 속 고요함에 나무, 하천, 새 소리가 더해지니 달릴 때마다 아 이렇게만 살고 싶다... 아니 아 아직 내가 살아는 있구나 하는... 다소 감성적이면서도 희망적인 느낌이 들곤 한다. 나는 주말 새벽 청계천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한다. 직박구리, 딱새, 참새 같은 청계천에 사는 새들의 새벽 울음도 사랑한다. 벚꽃과 개나리 등 청계천 주변을 화사하게 만드는 봄꽃들도 사랑한다. 겨울을 지나 수량이 풍부해진 하천 물줄기도 사랑하고, 이름은 알 수 없는 각종 수변 식물도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느끼며 달리다가 뜬금없이 이런 일상을 눈물 나게 사랑하게 되는 서먹함도 사랑한다.


한참 시간이 흘러 청계천에서 달리기를 하다 상대를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

어...

서로 말을 못 한 채 십 초 넘게 바라보던 우리는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는 같이 청계천을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으로 비켜났다.

청계천에는 어쩐 일이야? 집이 부천 아니었어?

뭐 좀 사러 나왔다가 이제 집에 가려던 참이었지. 너는 운동하러 나온 거야?

그냥 퇴근하고 가끔 시간, 날씨가 맞으면 퇴근길에 집 가는 방향으로 조금 뛰곤 해... 많이는 못 뛰고... 저녁은 먹었어? 오랜만인데 저녁이나 먹을까?

어... 그래. 술 마실 수 있으면 소주나 한잔하자.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가 가끔 청계천에서 만나 소주를 마시게 된 건 상대의 외모도, 말투도, 눈빛도 예전과는 너무 달라 오히려 동질감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의 건장함과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어진 상대는 뚱뚱하고, 머리숱도 많이 줄어들어 30대 초반임에도, 전형적인 40대 아저씨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사 얘기, 지물포 얘기, 얼마 전 도배하다 손을 심하게 베었다는 얘기들을 하며 그는 힘없이 쓸쓸해 했다. 나도 가끔은 직장 얘기, 동료 얘기, 나를 괴롭히는 상사 얘기를 꺼내었지만, 사실 우리들은 말없이 소주잔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가 더 많았는데 그래도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무언지 모를 애잔함 때문이었다. 왠지 옆에 그냥 있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그리고 그 느낌 속에서 나도 어느 정도는 편안함을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동대문 의류상가 건물을 지나갈 무렵 다시 그 새를 보았다. 천천히 뛰자고 마음먹었지만, 어느새 평균 페이스가 킬로당 5분보다 더 빨라져 다소 숨소리가 가빠지고 심박수가 올라가고 있음을 느낄 때였다. 옷을 두껍게 입은 탓인지 기온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땀이 많이 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또 한 번 닦아 내고 있을 때였다. 오늘 그 새들은 7마리 정도가 무리를 지어 날았다가 청계천 돌무리에 앉았다가 먹이를 찾는 듯 하천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내 눈에 띄어 사무실에 출근한 후 찾아본 새.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낸 그 새는 중대백로(中大白鷺, Great Egret), 황새목 왜가리과의 조류, 순백색의 깃털, 왜가리보다 약간 작지만 80-90cm 정도로 다른 새들에 비해서는 큰 편, 긴 부리와 검은색 다리, 우아하게 물가를 걸으며 먹이를 찾는 모습이 특징적이라고 했다. 동식물에 별로 관심도 없고 관심 가질 여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왠지 모르게 중대백로는 달리고 난 이후에도 내 머릿속에서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듯했다.

종각역 근처에 다다르면 청계천도 거의 끝에 다다르고 다시 달려서 돌아갈까 아니면 광화문 쪽으로 해서 대중교통을 타고 집에 갈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매운 낙지볶음집도 상대는 좋아했는데... 상대와 그 집에서 매워하며 한 잔, 맛있어서 한 잔, 낙지 한 점에 말없이 소주 한잔하던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달리고 있으면 가끔 초등학교 때 운동회 날이 생각나.

금요일 저녁이었나 퇴근하고 만나 청계천을 같이 좀 달리고 낙지볶음집에 앉아 소주를 몇 잔 기울였을 때 상대가 엄마 얘기를 꺼냈다.

그때 말이야. 부모님과 함께 하는 짝지어달리기 종목이 있었거든. 아버지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셨다고 엄마랑 달리게 되었어. 난 무지 화가 났지. 달리기를 잘 하는 아버지랑 해서 무조건 1등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사실 엄마는 다리가 아프셔서 좀 절룩이시거든.

너희 어머니가 그러셨었나? 난 몇 번 인사했어도 기억이 없는데?

나도 못 느낄 때가 많아. 아주 심하지는 않으셨을 거야. 그래도 달리기는 다르잖냐.

살짝 비가 내리기 시작한 데다 사람들이 점점 가게로 모여들면서 상대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얘기를 이어 갔다.

꼴찌 하면 창피한데...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야. 웬걸 엄마가 내 손을 정말 아파서 뿌리치고 싶을 정도로 꽉 부여잡고는 달려 나가는데 순간 섬뜩한 느낌까지 들더라니까. 목숨 걸고 달려야 할 것 같은? 이번에 지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 물론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있어서 미친 듯 달려 나가도 어느새 한 명 두 명 우리를 추월해 가는 거지. 그래도 3등을 해서 왼쪽 손목에 3이 제대로 찍힌 도장을 받고 말았어. 상품으로 받은 게 아마 노트 3권이었지?

어머니가 너 이기게 해 주려고 제대로 달리신 거네? 너도 좀 본받아라. 자꾸 달리다 멈추고 달리다 멈추고 쉬려고만 하지 말고 말야.

근데 선물도 받았겠다 등수에도 들었겠다 사진도 좀 찍고 반 친구들에게 자랑도 해야 하는데 엄마가 서둘러 집에 가자 하시더라구. 또 어린 마음에 그게 서운하기도 하고 엄마가 1등 못해 미안해하시나? 창피해하시나? 아님 정말 아쉬워하시나 이런 생각을 하며 집에 걸어갔던 기억이 있어. 나중에 커서 엄마에게 그날 기억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하시더라구... 난 지금도 이렇게 달리다 보면 그날 엄마와 함께 달리던 그 운동회가, 그리고 내 손을 부서질 듯 날 놓아 보내지 않겠다는 듯 꽉 부여잡았던 그 느낌이 생생한데 말야...


그나저나 상대는 왜 요즘 달리러 나오지 않는 거지?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오늘은 꼭 전화해 보리라 다짐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중대백로 중 한 마리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듯했다. 어느 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면 누군가가 나를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듯 노려보던 기억... 비슷했다. 순백색의 우아한 모습을 하고, 서 있을 수나 있나 싶은 얇은 다리로 돌을 밟고는 그러나 부드러워 보이는 S자 목 형태 위에 뿔처럼 튀어나온 긴 부리는 약간 나를 서늘하게도 만들었다.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리였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며 상대와 나는 각자의 사회 반경에서 최선을 다해 30대 중반을 조용히 버텨 나가고 있었다. 가끔 만나 달리기도 하고, 가끔은 소주 한잔하며... 나는 그때 회사에서 대리를 달았지만 신입 직원 하나 없는 막내라 상사 뒤치다꺼리 전문이었고 그 분노를 상대에게 털어놓았다. 그때마다 상대는 흐릿하게 지내고 사는 자신의 삶을 짧게 얘기하고는 역시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앞에 놓인 소주잔을 길게 바라보고는 했다.

어느 날 저녁 비를 피해 포장마차에 들어가 낙지볶음을 주문하고 빗소리에 취해 얼큰하게 몸이 달아올랐을 때 상대가 말을 꺼냈다.

여자친구 있나?

어. 조만간 결혼할 수도 있고...

그렇구나.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는 상대에게 너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한참을 또 그렇게 소주잔만 바라보고 있을 때쯤 상대가 말을 꺼냈다.

내가 사람을 좀 싫어하잖냐. 근데 도배일도 그런 거야. 여자들이 도배하는 남자를 좋아하겠냐?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노가다와 다를 바 없으니 피하기만 하는 거지. 아버지가 건물주고 내 명의로 건물도 하나 옮겨줬는데 그렇다고 여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이 다가 아니더라구... 우리 아버진 내가 건물주니까 돈 보고라도 여자들이 붙을 거라 했는데 세상이 바뀐거지... 아무리 돈이 좋아도, 지물포 가게에서 하루 종일 사람 상대하고 풀칠하고 머리에 풀 바르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분 좋게 맞이하기는 싫은 거지.

야 그래도 나처럼 돈 없는 거보다야 낫지. 곧 여자 만날 거다.

오늘은 술을 좀 많이 마셨는지 빗소리에 취기가 더 오르는지 전보다 혀가 더 꼬부라진 채 상대가 말을 많이 했다.

근데 말야. 내가 얼마 전에 여자를 한 명 만났거든. 얼굴도 반반하고 싹싹한 게 맘에 쏙 들더란 말이지. 내가 지물포에서 일한다고 하는데도 힘들겠다며 밥이라도 잘 챙겨 먹으라고 하더라구...

오 그래? 근데 왜 말 안했어? 잘해봐. 나중에 소개도 시켜주고...

니한테 말은 안 했는데 나 몇 달 만났다. 그리고 이 사람하고 결혼할까 마음도 먹어봤고 말야. 그래서 집으로 데려갔다. 인사나 시키려구... 뭐 집에서 반대할 일은 없겠다 싶었거든. 이 여자 집안도 나쁘지 않고 대학도 나오고 부모님 다 살아계시고 시골에서 농사 지으신다는 데 매달 음식도 엄청 많이 보내오시더라구.

근데? 표정을 보면 잘 된 것 같지는 않다만... 여자가 뭐 숨긴 게 있었냐?

아니. 알고 보니 우리 엄마가 뭘 숨기고 있었어.

뭘?

사실 이 친구가 대학교 때 운동하다 다리를 좀 심하게 다쳐서 좀 절면서 걷거든. 그걸 보신 어머니가 바로 퇴짜를 놓으시더라구.

왜?

한참을 망설이듯 소주잔만 만지작거리던 상대는 결심한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빗소리가 거세지는 게 오늘은 청계천 내려가는 길은 위험해서 막겠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순간이었다.

엄마 다리 한쪽이 의족이었다네. 나는 이제껏 그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모르고 산게 비수(匕首)였다네.

“내가 아들 너에게 나 장애인 거 감추려고 평생 어떻게 살아온 줄 알아?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어. 평생을 죄지은 사람처럼, 남의 물건 훔친 사람처럼 들킬까 두려워 피하고 숨고 한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어. 근데 니가 내 마음에 지금 비수를 꽂은 거야. 알겠냐? 저 여자는 절대 안 된다.”

...

...

그 여자를 보내고 엄마 다리를 보는데 그래도 모르겠더라고...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나랑 달리기도 같이 했었던 말이지. 비수라는 말에 내가 화를 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저 여자를 붙잡으러 가야 하나 뭘 해야겠는지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는데 한 마디만 머릿속을 뱅뱅 돌더라고...

사람이 두려워 피하고 숨고 한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왔다는 엄마의 말이... 근데 이 나이 먹도록 나도 그래 엄마...


그날 이후로 상대는 자신의 건물로 숨어 들었다. 때가 되면 새가 자신의 둥지 안에 자리 잡듯 상대는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약간은 오래된 건물 안에 둥지를 틀었다. 나오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는다고 했다. 배고프지도 않고, 가끔 아버지가 반찬 물어다 주면 깨작거리며 받아먹는다며 자기가 아기 새가 된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달리기할 때만 가끔 밖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달릴 때마다 엄마가 생각난다며 멈춰 설 때가 많았다. 한번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슬며시 웃으며 이 둥지는 곧 무너질지 몰라. 내가 1인용으로 만들었거든 크크 하며 여기 오면 위험하다는 농으로 답변을 대신하고는 했다. 삶에 지쳐 있던 나도 상대를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거나 무뎌지고 있었거나 했다. 그렇지만 그날 이후 청계천을 달리다 그 포장마차 근처가 되면 왠지 모르게 비수가 떠오르곤 했다. 상대는 정말 어머니에게 비수를 꽂은 걸까 아님 어머니가 상대에게 비수를 꽂아 둥지에서 못 나오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하긴 나도 누군가에게 매일 비수를 꽂고 내가 정작 비수를 꽂았는지도 모른 채 비수를 수없이 날려대는 사람들을 피해 숨기 바빴으니까.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에서는 누구의 비수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꽂히면 아픈 건 매한가지니까...


새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을까? 그러면 새들이 이기지 않을까? 근데 왜 새들은 그냥 저러고 살까? 이기는 법을 몰라서? 그냥 싸우기 싫어서?

가끔 달리면서 저 새들이 떼로 나를 공격하면 어떡하지?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텐데? 하는 상상을 했었다. 상대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상대는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냥... 쟤네들도 사람 옆에서 과자 부스러기 얻어먹고 사는 편함을 느낀 게 아닐까? 치고받고 싸워서 기껏 올라가 봐야 내려올 일밖에 더 있나? 가만히 힘없는 척 지는 척 하고 머물다 보면 나름 편안함도 생기고 안정감도 찾고 작든 크든 나만의 삶의 평수가 생기는 걸 우선하는 거 아닐까?

상대야 지금 너도 그런 거야? 난 웃으며 농으로 떠들었는데 속으로는 상대가 화나서 집에 가 버리면 어쩌나 뜨끔했다.

나? 난 아니다... 아니네. 그러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네가 말한 새가 바로 나인 것 같기도 하네...

그날 이후 청계천을 달릴 때면 내 입에서 주문처럼 중대백로가 상대 같네. 상대가 중대네. 중대가 상대가 되면 상대가 되려나... 하는 말 같지 않은 말장난이 맴돌고 맴돌았다. 마라톤 대회를 나가 마지막 골인 지점을 앞두고는 전력 질주를 하며 일부터 백까지만 중얼거리면 끝난다, 일, 이, 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문처럼 중얼거리게 되는 그 느낌으로...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에 얼른 마침표를 찍고 골인하고 싶은 것처럼, 그리고 상대의 어머니, 상대의 이제는 헤어진 여자친구, 중대백로를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머릿속을 비워 깨끗하게 다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주문을 외워댄 것만 같다. 상대, 중대, 상대, 중대, 중대, 상대...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나에게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나의 가슴팍을 노리는 듯 돌진 앞으로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나와 부딪치고 나면 새는 어떻게 될까, 새는 투명 유리창이 정말 자신이 통과할 수 있는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날아다니는 하늘의 일부라고 판단했다가 뭐지 이게 아닌데 라고 느끼기도 전에 목이 꺾이고 유리창을 붉게 물들인 채 낙하하는 장면처럼 내가 투명 인간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순간 통증을 느끼고 붉어진 옷을 바라보며 뭐지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게 될까... 중대백로였다. 복잡하다 못해 서로 안 부딪치고는 지나다닐 수도 없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30년을 넘게 살았어도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자꾸만 옆으로 비켜나게 되는, 그런 나를 한심한 듯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닿을까 주저하며 옆으로 옆으로 비껴 있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그래도 달리며 위안을 얻고, 사람들 많은 시간을 피해 새벽이나 아주 늦은 밤 조용히 살고 있는 나에게 왜?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는 새를 바라보며 달리기를 멈추고는 덤벼보라는 듯 가슴팍을 열어젖혔다. 그래 한번 와봐라. 내가 투명 인간이 아닌 이상 어느 순간이 되면 지가 무서워 옆으로 비켜나겠지.

아니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나를 관통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새와 나는 정말 부딪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도심 속 동물들이 인간들이 맘에 안 든다고 떼를 지어 공격하고, 새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상상만 하던 그 시간이 이제 온 걸까? 아차 상대를 너무 쉽게 봤나... 이제야 번쩍 그런 생각이 든 그 순간, 그 새는 정말 나를 관통해 지나가고 있었다. 팍!


새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유리창에 부딪혀 목이 꺾이는, 먹잇감으로 오해한, 나보다 더 강한 상대인 줄 모르는, 그래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한때 아무 걱정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가벼움을 어느새 소중한 과거로만 기억하고 있는,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잊어버린, 내 하늘이 아닌 곳을 날고 있는 중대백로. 청계천에 서식하며 하루하루 행복했을까? 사람들이 먹다 던지는 빵이나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며 부끄러움을 느낀 적은 없었을까? 새의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 은근히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관통은 당했지만, 아프지만, 오히려 그 전보다 많이 삶이 괜찮아졌다고도 느낀다. 부엌칼처럼 자주 사용하면서도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정작 흉기가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 그 익숙함. 너무나도 익숙해 정작 당할 줄은 몰랐던, 가슴팍에 꽂힌 불쌍한 중대의 부리를 보며, 이제는 비수가 되어 버린 그 부리를 바라보며 그 순간 따뜻하고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4월의 행복이 잠시 생각났다. 상대에게 전화는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5.06.10. 김원중. 끝.]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김작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