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여성작가의 책 | 제인 오스틴의 책장 (리베카 롬니)
우리가 예전 애독서를 다시 꺼내 드는 데는, 처음 그 책이 일으켰던 감정을 다시 경험하려는 마음이 작용한다. 하지만 책도 어쩔 수 없이 우리와 함께 변한다. 삶이 달라졌기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책은 정적인 물건이 아니다. 내가 책 읽기를 사랑하는 것은 책이 일으키는 정서를 안전거리에서 나만의 속도로 탐색할 수 있어서다. 재독은 반복 경험이지만, 그 이상의 경험이기도 하다. 나는 재독 시 지난 독서의 감정을 되살린다.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동시에, 이번 독서의 감정을 감지한다. 내 현재 자아의 윤곽을 짚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내 삶과 분리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의 중심이다. (p.210)
구혼 소설을 폄하하는 시선은 이 플롯들을 기혼녀 지위라는 법의 맥락에서 바라보지 못한 소치다. 남성이 여성과 자녀의 삶을 광범하고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어떤 남자와 결혼할지는 말 그대로 생사의 문제였다. 영국 구혼 소설의 역사는 곧 팜 쿠베르트에 맞선 여성 저항의 문학사였다. (p.342)
‘모든 로맨스 소설은 “오만과 편견”의 오마주’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나온 얘기였는데, 어쩌면 내 팬심에서 비롯된 말일 수도 있고, 친구가 해준 말일 수도 있고, 비슷한 말을 부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둘처럼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다가 푹 빠지게 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는 것이다. (요즘 웹소설에서 하는 말로는 ’혐관물‘ 아닐까?) 제인 오스틴의 작품 중 “오만과 편견”이 제일 유명하겠지만, 그 작품만 재미있는 건 아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제인 오스틴의 팬은 ‘제인아이트’라고 불리며 탄탄한 팬덤을 자랑한다.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영국 문학사에 여성 작가로서 자리매김한 제인 오스틴, 과연 그럼 그녀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천재 작가인가?
희귀서 수집가이자 (역시나) 제인 오스틴의 팬인 저자 역시 이런 의문을 품었다. 제인 오스틴에게 영향을 미친 작가, 특히 여성 작가를 찾기 위해 오스틴의 작품에 언급됐던 작품, 편지나 전기에 언급된 작품을 사들이고 찾아 헤매며 저자는 제인 오스틴에게도 영향을 미친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 왜 우리는 제인 오스틴은 알아도 그녀들은 모르는 걸까? 제인 오스틴만큼의 대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들도 굉장한 작가일 텐데 말이다. 그녀들의 작품을 추적하다 보니 언제부터 그녀들이 세상에서 지워졌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작가는 모두 오스틴에게 영향을 미쳤던 여성 작가로서 총 여덟 명의 작가이다. 프랜시스 버니부터 마리아 에지워스까지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 작가들은 당대에 인기 있는 책을 출간한, 영향력 있는 작가였다. 그녀들이 활동한 18세기에는 많은 이들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비난했다. 특히 여성이 소설을 읽으면 허황된 생각에 빠진다고 비난할 정도이니, 젊은 여성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치욕에 가까웠다. 특히 고딕 로맨스 장르가 상업적이고, 여성이 주도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남성 평론가나 영향력 있는 남성은 장르를 혐오하기도 했다. 그들이 그 장르를 주도한 여성도 불신한 것은 물론이다. 심지어 그 장르로 성공까지 한 여성 작가라니! 그들의 입장에선 얼마나 미웠을까.
혹은 오스틴을 치켜세우기 위해 영향력 있는 남성 평론가가 다른 여성 작가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저자도 의문을 표한다. 대체 왜? 여성 작가는 훌륭한 작가가 둘 이상 있으면 안 되나? 할당량제인가? 남성 작가는 여럿 있어도 되고? 여성 작가의 사생활을 비난하기도 한다. 작품이 아닌 작가의 사생활로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다. 남자 작가에게는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던 잣대는 여성 작가를 향하면 엄정하게 변한다.
저자는 그들의 초판본을 수집하면서 하나씩 컬렉션을 구축해 나간다. 그러면서 어느 시점에 어떻게 이들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는지, 마치 명탐정처럼 증거를 찾아가며 밝힌다. 그들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편견에 대해 고백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즐겁게 또 어떤 책은 다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평한다. 오스틴의 책장을 완성하는 추적기의 어려움과 문학 작품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고백으로 한껏 친밀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쉽게도 저자가 소개한, 오스틴에게 영향을 미친 여덟 작가는 한국에 번역본이 없다시피 했다. 오스틴의 팬으로서 이들의 작품이 하루빨리 한국에 소개되기를 바란다. 하루빨리 나 또한 오스틴의 책장을 엿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