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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Jan 08. 2022

환대받지 못할 때, 자기 땅의 이방인들

2020년 6월의 여성작가의 책|자기 땅의 이방인들(앨리 러셀 혹실드)

책속의 말

트럼프 지지자들은 잃어버린 삶의 방식을 애도해왔다. 많은 이들이 실망했고, 의기소침했다. 자부심을 느끼기를 갈망하지만 오히려 수치심을 느꼈다. 그 사람들이 사는 땅은 이제 자기 땅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하고 비슷한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은 지금, 그 사람들은 희망과 기쁨과 고양감을 느낀다. "내 앞에 이런 남자가 있다니!" 두 팔을 치켜들면서 놀라운 마음을 표현한 남자는 황홀경에 빠진 듯했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이제 그 사람들은 자기땅의 이방인이 아니었다. 



트럼프가 당선되던 날의 기억이 난다. 힐러리의 당선을 간절히 바랐고, 내심 그렇게 되지 않을까 (미국인들이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생각했었기에 트럼프의 당선은 더 충격적이었다. 멀리 떨어진 한국에 사는 사람 하나랑 미국 대통령 간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어서 트럼프의 당선에 그렇게도 절망하냐고 한다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당시 나의 혈육이 미국에 살고 있었다. 또한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혐오로 무장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당시 일기에 '이제껏 내가 믿고 있던 가치가 부정당하는 느낌이기 때문에 좌절했다. (중략) 앞으로 혐오의 물결 속에서 살아가야할 세대에 대해 슬픔을 느꼈다.'라고 썼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 뒤 혐오범죄가 급증했다는 기사가 여럿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미국인들은, 특히 미국 우파들은 트럼프에 열광한 걸까.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트럼프가 정말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거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멍청한 백인들이라고 치부했었다.

"감정노동"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앨리 러셀 혹실드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의 남부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부자가 아니고, 자신에게 해가 가는 선택이지만 그곳에 투표하는 극우파들의 시각, 정치가 과연 그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트럼프 열풍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직접 미국 남부로 날아가 수많은 티파티 지지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답을 찾아간다.

저자가 만난 티파지 지지자들은 주로 넉넉하지 않지만 성실한 백인층이다. 대부분 기독교를 믿고, 명예를 중시 여기며, 자수성가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의 터전은 거대한 석유 회사 등으로 인해 오염되었고, 점점 삶의 터전은 좁아지기만 한다. 이들은 환경 문제를 걱정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그게 경제, 일자리다. 그렇다면 석유가 실제로 가난한 우파에게 자유를 선사하는가? 석유가 제공하는 일자리는 생각만큼 많지 않으며 석유 때문에 오히려 다른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한다. 이들은 그저 석유회사에 세뇌를 당한 걸까?

이것을 토대로 2부에서는 제도적 맥락을 살펴본다. 교회와 언론을 통해 이들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마음 속에 굳게 자리잡은 '내면의 이야기'가 무엇이기에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연방 정부를 혐오하는 방향으로 흘러갈까? 저자는 한 꺼풀씩 이들의 이야기를 벗겨 나간다. 

내면의 이야기란 '주관적 프리즘'이다. 각자에게 내면의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우파가 공유하며 공감하게 된다. 우파의 내면의 이야기는 대부분 소수자성을 이용하는 소수자, 그들을 돕는 연방정부, 미국 남부 백인을 희화화 하는 미디어에 대한 분노 등이 있다. 이들은 우파는 도덕적 비난을 받고 소수자 정책에 의한 피해자라고 느낀다. 이들은 자아에 대한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일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주장하고, 종교와 국가,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려 했으나 이제 노동은 무너지고 남부의 지위는 낮아지고 있으며 가족이라는 가치는 해체되고 있다. 코즈모폴리탄적 자아의 등장으로 이것들은 명예의 원천이 되지 않는 것이다. 즉, 이들은 아메리칸 드림의 도덕적 자격이 바뀌며 자신들은 자기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다는 내면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트럼프다. 트럼프는 경제적 지반이 불안정하고, 문화적으로도 소외되고 인구학적으로 쇠퇴된 이들에게 더는 '자기 땅의 이방인'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외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나쁜 편'을 몰아내는 우리는 '좋은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는 '다수'가 된 느낌을 '느끼게' 한다. 극우파들은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가 진실이며, 자유주의자들은 PC를 내세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감정적 자기 이익'이었다. 나의 땅에서 내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나는 '기분'이고,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이다. 극우파가 득세하는 현상을 봤을 때 말이다. 저자는 이것을 마지막 4부에서 설명하는데,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근거가 이 챕터, 특히 15장에서 깨달음의 언덕을 올라 마침내 정상의 경치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나 또한 이 책을 읽기 전에 정치적 선택은 자신의 이득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이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감정적 이익에 민감했다. 내가 이 땅의 이방인이 된 느낌, 이전처럼 환대받지 못하는 느낌은 아주 극단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선택하게끔 하는 거대한 이익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생각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예: 환경과 일자리는 대립한다)은 실제 데이터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저자는 좌, 우가 상호 협력이 필요한 관계며 진영을 넘어 인간 대 인간의 교류는 이 벽을 넘어트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지만, 당장 나부터 나와 다른 진영의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고, 나의 내면의 이야기를 강화시키곤 한다. 이 책을 읽고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는 알겠으나, 이제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 라는 한숨부터 나오는 건 아직 내가 많이 모자르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마냥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이방인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유사한 선택을 하는 이가 많다. 나 또한 이 나라에서 언젠가 이방인으로 느껴질 때 어떤 선택을 할지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의 내면의 이야기만을 강화할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이 저자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 실천한, 벽을 부수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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