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보-스들의 수다방>을 위해 정리한 글이며 아카이빙 목적으로 업로드합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중간 중간 내용을 뛰어넘는 구간들이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직후 정리한 글
시선, 응시.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많이 곱씹었던 단어는 단연코 '시선'이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치들을 이용하여 두 사람의 시선을 보라고 소리쳤다. 그 의도를 나름대로 해석해보기 위해 아래와 같이, 나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시선'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 시선을 응집시키는 촬영
도입부가 지나고 어느 순간 온몸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이 영화엔 O.S샷(한 인물의 어깨너머로 상대방 모습을 포착한 장면)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좀 더 극 중 인물의 시선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O.S샷은 인물이 대화할 때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컷으로, 화면의 깊이감을 더하고 교차편집을 통해 자연스러운 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거의 모든 영화의 대화 씬에 사용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O.S샷이 없다. 한 시퀀스 안에서의 원 샷은 그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똑같은 사이즈에 똑같은 앵글 구성, 이토록 평등한 촬영과 편집은 말하는 사람의 시선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마리안느의 시선을 따라 컷이 전환되면 동일한 사이즈와 동등한 아이레벨을 유지하고 있는 엘로이즈가 나온다.
소피와 함께 등장하는 쓰리 샷에서도 이 구도는 정확하게 유지된다. 그 누구도 강자의 앵글에 서지 않으며 약자의 앵글로 내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나란히 서있는 셋의 모습에서는 역할의 반전까지 빈번하게 일어난다. 엘로이즈의 엄마가 며칠 외출한 사이, 하녀의 표식인 모자를 벗은 채 자수를 놓고 있는 소피의 모습의 옆에 음식을 하고 있는 엘로이즈의 모습,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앉아있는 마리안느의 평면적인 쓰리 샷은 그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않고 있는 관계성을 짙게 드러낸다.
더불어 카메라를 통해 인물들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영화에서 엘로이즈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졌던 의문은, '저 방이 언제 등장할 것인가.'였는데, 등장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픽스 컷은 인물들이 어떤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제시해주지 않는다. 보통 저택이 주요한 로케이션인 영화의 경우, 영화 초반에 그 공간을 속속들이 훑는 것에 시간을 할애한다. 이 경우, 스테디캠으로 인물들의 뒷모습을 유려하게 쫓아가며 공간에 대한 기대감과 인물들을 소개하기 바쁘다.(대표적인 영화로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있다. <스토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오로지 인물들의 관계, 대화, 그들의 눈빛만이 중요하게 비친다. 엘로이즈가 약 20분 대에 등장하는 것 역시 여타 다른 영화들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 (이 역시 다소 충격적이라 굳이 시계를 스크린 앞에서 확인했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엘로이즈가 등장했다)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오는 요소들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했다.
* 엔딩 씬은 결국 마리안느의 환상일 것이라는 생각
개인적으로 엔딩 씬은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대상을 토대로 엄마와, 남편과 종속 관계에 놓여있었던 엘로이즈의 계급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엘로이즈는 혼자 그곳에 있었다.
엔딩까지 유지되던 촬영 방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인물을 향해 계속해서 줌이 되며, 시점 샷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을 만큼 인물에 카메라가 바짝 다가선다. 그 시퀀스의 전까지, 카메라가 인물을 향해 다가갔을 때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가 진전된 이후였을 뿐이었다.(피아노를 치던 시퀀스, 웃으며 초상화를 그리던 시퀀스) 그마저도 역동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엔딩씬의 경우, 마리안느의 시선보다 훨씬 더 깊게 카메라가 이동했다. 영화 안에서 가지던 카메라 법칙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린 컷이었다. 때문에 이는 인물의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마리안느가 보는 엘로이즈의 환영이 등장했다. 이를 복선으로 해석했다.
* 남감독 영화와의 차별점
가장 큰 특징 : 불필요한 섹스 신이 등장하지 않는 것.
예전에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한참 이슈였을 때, 남자 관객으로부터 섹스 신이 너무 불편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무조건 그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영화 볼 줄 모르는 놈'으로 욕하고 싸웠다. 그러나, 나중에 터진 감독의 성폭력과 영화를 보는 눈이 달라짐으로써 그 영화 안에 그 많은 섹스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본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것이 맞는 것이었다. 관음적인 카메라와 남성의 눈으로 그려진 여체. 강압적인 촬영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더욱더 불편한 지점들이 되었다.
국내 영화인 <아가씨>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해외에서 호평받는 국내 남감독들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피씨함'에 취해있는 서양에서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일종의 변태적인 감성이 묻어있다는 것. <아가씨> 역시 마찬가지다. 각성 이후 다시 곱씹어본 그 영화는 숱한 장면에서 여성의 신체를 망가뜨리고 폭력을 저지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영화는 촬영 현장에서 박찬욱 감독이 섬세하게 섹스 신 촬영장을 컨트롤했다는 일화 하나만으로 올려치기를 당했고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러한 관음적인 섹스신을 전면적으로 배제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인스타그램으로 구독자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 몇 분께서 ‘겨드랑이 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내주셨다. 내가 생각한 답은 이러하다. 위에 열거한 불필요한 섹스 씬의 대체인 것이다. 겨드랑이 털을 정면에 내보임으로써 여성에게 옭아매어지는 또 하나의 사회적 통념을 부수는 한편, 모든 신체를 노출하여 일차원적으로 행위하지 않아도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선보일 수 있다는 감독만의 연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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