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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케이 Apr 13. 2023

30개월의 환불전쟁

승자 없는 전쟁의 끝

오늘은 꼭 환불을 받아야 한다며 비장한 각오로 서비스센터의 영업시간을 확인한다.

25분만 기다리면 된다. 서비스센터 상담원에게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쓰린 속을 새까만 커피로 달래 보지만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오늘은 꼭 이 지긋지긋한 환불전쟁에 승리의 깃발을 손에 쥐리라 비장한 각오를 다진다.






대학 동기인 세 명의 친구와 호기롭게 여행 공금을 모두 털어 티켓을 예약한 건 4년 전 일이다.

처음에는 미국에 사는 친구를 셋이 보러 가는 게 여행의 취지였으나, 여행이 본격화될수록 목적지는 점점 미국과 다른 곳으로 향했다. 결국 목적지는 태국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 명은 미국에서 출발해 따로 오기로 하고 한국에서 넷이 출발해 공항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여행을 계획하는 건 생각만으로 설레는 일이었다.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유부녀들에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닌 데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더욱 그랬다.

한동안은 마치 MT를 준비하는 대핵생처럼 모두 들떠있었고, 하루빨리 여행 가는 날이 와 일상으로의 해방을 맞이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는 코로나가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 첫 번째 확진자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금방 지나가는 감기처럼 가볍게 받아들였다. 독감처럼 계절이 지나면 확진자는 줄어들 거라 믿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행을 가겠다는 우리의 굳은 의지가 강력한 믿음의 원천이었다.

‘메르스나 사스도 엄청 심각하게 얘기하더니 지나갔잖아. 한 달만 지나면 잠잠해지지 않을까’

‘그래. 설마 이것 때문에 여행 못 가기야 하겠어?’

‘괜찮을 거야. 좀 더 기다려보자’

모두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질 거라 믿고 싶었다.

각자의 스케줄을 어렵게 정리하고 결정한 여행을 무엇도 방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코로나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확진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튜브와 뉴스에 연일 등장했고, 여행을 떠나고자 했던 들뜬 마음은 어느새 불안함으로 변질되어 갔다.

코로나 확진자 수를 뉴스만큼 빠른 속도로 단체 채팅방에서 공유한 지 3개월 만에 결국 우리는 항공권을 환불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환불을 요구한 지 한 달이 지나도 카드의 승인 취소내역을 확인할 수 없었다.

'왜 아직도 안 됐지? 신청자에서 누락된 건가?'

코로나로 환불요청이 많아 지연될 수 있다고는 했지만 환불절차가 한 달이 넘는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당시 이 환불전쟁이 장작 30개월이 걸릴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비스센터에 전화연결이 되고 나면 상담원은 육성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환불은 항공사에서 처리해주어야 하는데 본인들은 환불접수를 했으니 기다려보라는 말 뿐이었다.

소비자보호원에서는 해외항공사라 본인들은 피해구제 신청을 해줄 수 없다고 했고, 항공사는 여행사에서 구입한 항공권은 여행사를 통해야 하니 환불을 요청했다면 기다려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2~3개월에 한 번씩 환불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23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받지 못한 채 묶여 있는데 여행사도 소비자보호원도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니 무력해졌다. 어쩌면 이대로 환불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나니 오히려 감각이 무뎌졌다.

항공사의 파산과 회생절차로 인해 더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받은 이후에는 오히려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다.

초록창에 항공사 환불에 대한 글을 검색해 보니 항공사에서 직접 구매한 고객들이 먼저 환불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사를 믿고 구매했던 고객들은 뒷전이고 해당 여행사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 같아 배알이 뒤틀렸다.

나는 고작해야 1년에 서 너번 고객센터로 연락해 ‘아직 환불받지 못했음’을 인지시키는 것이 전부였지만, 친구들과 소중히 모았던 여행공금을 허무하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이제는 받아낸다’는 비장한 각오로 서비스센터에 전화연결을 시도했다.

매번 같은 레퍼토리를 읊는 것부터 시작하는 이 절차는 나름의 기싸움이다.

매뉴얼대로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인지 고지하는 상담사에게 최대한 빠른 피드백을 얻기 위한 나만의 기싸움.

상담기록이 있을 법도 한데, 매번 같은 것을 묻고 답하는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내가 고객임에도 ‘을’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는 최대한 자세한 정보를 주고 빠른 피드백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객님, 아직도 환불받지 못하셨다는 말씀이시죠?”

“네. 아직 환불내역 확인이 되지 않아요. 근데 환불이 안되었다는 사실도 모르시는 건가요?”

“환불은 항공사에서 처리해 주는 문제라 저희는 바로 확인이 불가능하거든요.”

“환불이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확인 후에 연락 주세요.”


전화할 때마다 매번 좋은 감정일리 없으니 통화를 할 때마다 내 말끝에는 감정이 꼬인 만큼 말끝도 두어 바퀴쯤 꼬여있다.

수수료를 받고 티켓구매를 중개하는 여행사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수수료가 몇 만 원이라고 해서 책임감도 몇 만 원 짜리라 생각하는 건 아닐까.

얼추 3~4시간 정도 지난 후에 고객센터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다.


“OOO고객님 되시죠.”

“네”

“아까 상담드렸던 상담원입니다. 항공권이 환불되지 않았다고 연락 주셨었죠?”

상담원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다르게 한층 격앙되어 있었다. 좋은 징조다.


“네 그런데요.”

“고객님, 2022년 10월 18일에 고객님 카드승인 취소가 된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해당카드사에 연락하셔서 승인취소건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이미 환불이 됐단다.

상담원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매번 시일을 미루며 나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여행사 상담원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건 경험으로 누적된 데이터에 의해서이다.


“지금 환불이 이미 됐다는 걸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럴 리가 있나요? 카드앱에서 취소건은 알림이 오는데 저는 받은 적이 없어요.”

“그건 카드사에서 직접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늘 이런 식이다 싶었다. 매번 내 일이 아니다 그건 항공사의 일이고 저건 카드사의 일이라는 식의 미루는 답변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곧장 카드사로 전화했다.

카드사의 상담사는 오래전 데이터라 조회에 시간이 소요되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상세히 어떤 건인지 되물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2020년 2월 구매하신 항공권 내역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가요?”

“네. 현재 데이터로는 그렇습니다”


이때의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상대는 주었다 생각하는데 나는 받은 적이 없다.

꼬여도 뭔가 단단히 꼬였구나 싶었다.

이때 불현듯 카드대금이 인출되는 통장으로 입금이 되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2022년 입금 데이터를 조회해 보니 카드사에서 입금된 230만 원 가령의 금액이 찍혀있었다.

‘이거구나! 왜 이걸 모르고 있었지?’

카드대금이 인출되는 통장은 나의 사업자 통장이다. 입금내역에 카드사 이름이 찍혀 있으니 당연히 카드대금이 입금된 것으로 오해한 나의 불찰이었던 것이다.

여행사 직원 말이 맞았다. 그런데 카드사 직원은 왜 승인취소 내역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30개월 전의 카드 내역이라 뭔가 데이터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뒤늦게 카드사 직원은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30개월간의 환불전쟁은 승리자 없이 막을 내렸다.

환불소식을 친구들에게 전하니 모두 잊고 있던 공돈이 생긴 것 같다며 좋아했다.

30개월이면 태국도 걸어서 다녀오고 남았겠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다시 채워진 여행경비를 어디에 쓸지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브랜드로써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해당 브랜드의 여행사와 카드(두 여행사와 카드사는 계열사이다)를 사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블랙컨슈머는 이렇게 탄생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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