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디아케이 Apr 09. 2023

창업은 고용연장의 기회였다

고용연장을 위해 나를 고용하기로 했다


4년 전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자의 길을 택했다. 마흔이 다 되어갈 무렵, 언제까지나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불안함이 나를 세차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마흔 쯤 되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팍팍하고 통장 잔고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대로는 10년 후에도 똑같이 살아갈지 모른다는 회의감이 무섭게 나를 덮쳤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현실의 성적표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너 언제까지 다른 사람 회사에서 고용인으로 살래?’

평생 직장인으로 살 수는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기 직전에 갖는 조바심이 나를 자주 꾸짖고 질문을 쏟아냈다.

치열하게 질문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나의 결론은 창업으로 좁혀졌다.

다른 사람의 회사가 나를 평생 먹여 살릴 수 없다면, 내가 나를 고용하면 그만이라는 논리에서였다.

세상에 나만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력이 또 있을까.


창업을 결정하고 두 달간 직장생활을 병행했다. 출근과 업무, 야근과 퇴근이라는 흔한 K-직장인의 루틴에 창업준비를 더하다 보니 자면서도 창업을 구상하고 계획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를 고용하기 위한 업(業)을 만들기 위해 잠자는 시간마저 할애해야 했지만 몸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보내던 시기였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은 나의 창업 준비기간 중 가장 가슴 뛰는 시기였다.

꿈을 꿀 때 사람은 에너지가 샘솟는다는 것을 그때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창업을 결정했지만 창업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창업자금 외에 생활비와 보험료, 주택담보대출금까지 고려하면 통장의 잔고는 기껏해야 두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잔고뿐이었다.

때문에 남편의 명의로 회사대출을 최대치로 받아야 했다.

창업을 위해 현실감 없는 1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대출받는 무모하고 용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때의 나는 나의 결정이 옳다는 것을 빠르게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51%의 확신이 100%가 되는 것을 가능하면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두 달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9년 12월 스터디카페를 개업했다. 점포장사는 처음인 새내기라 모든 지식을 새로 배우고 익혀야 했다. 대부분의 고객은 10대~20대인 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Z세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 또한 하나의 난제였다.

오픈 날 첫 고객의 결제가 있던 그날의 기억은 벅차오름 그 이상이었다.

추운 겨울 언 손을 녹여가며 인근 주택가에 전단지를 붙이며, 한 달간 홍보를 한 덕인지 오픈 날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진짜 되는 거였어!’

나름의 확신도 든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의 창업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이대로 라면 내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권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자영업자로써 적응기도 채 끝나기 전 2020년 예상치도 못한 복병 코로나가 전 세계에 창궐했다.

이름도 생소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감염자로 물들이고, 사람들은 공포에 집 밖 출입을 두려워했다. 타인과의 대면은 불안함을 넘은 생명의 위협이었다.

그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공공장소와 다중이용시설을 극도로 꺼렸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에 예외는 없었으니 당연했다.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찾아온 코로나는 우리 부부를 위기에 빠뜨렸다.

‘지질히 운도 없지. 개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누구의 탓도 아닌 바이러스를 탓하고 있었다.


2020년 2월 우리나라에 두 번째 감염자가 나온 이후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부딪쳐야 했다.

오빠, 어떡하지… 이거 오래갈 것 같은데…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아. 방법을 찾아 할 것 같아”

남편과 머리를 맞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자기야, 지금은 이 위기를 이용해야 돼. 매일 하루에 2번씩 에탄올로 소독하며 관리하고, 자기는 그걸 광고로 만들어줘”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조언이었다.

“그래 해보자. 내가 이미지 만들게”

 

당시에는 정부에서 소독과 개인위생에 대해 활발하게 홍보하던 시기도 아니었다.

고객에게 안전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고, 소독과 환기를 통해 바이러스의 확산을 최소화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빠르게 홍보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온라인광고도 했다.

남편의 아이디어는 고객에게 통했다.

코로나 시기에도 매출이 떨어지지 않고 매년 최고점을 갱신하는 기록을 세웠으니 말이다.


운이 좋게도 그로부터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스터디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장과 고객의 요구, 경쟁점의 출현으로 인해 매일 위기의식을 느끼며 말이다.


시한부와 같은 직장인의 삶이 불안해 자영업을 선택했지만, 자영업은 살얼음판에 서있는 외로운 싸움을 매일 치러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나의 업(業)을 만들어내고, 나의 평생 고용주가 되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도 잘 알게 되었다.

나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매출을 끌어올리고, 고객에게 돌려주기 위한 노력을 아까지 않는 것.

작은 점포 장사를 하고 있지만, 나름의 경영방침도 세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곳에서 스터디카페를 운영하게 될는지 장담할 수 없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나는 나의 평생 용주가 되기로 한 것.

그것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어머니’ 아닙니다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