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모두 어머니라는 착각
찌르르한 복통에 식은땀이 주룩 흐른다. 새벽 내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한 통에 수분이 다 빠져나가 반 건오징어라도 된 것처럼 흐물므물해진 기분이다.
옷방에서 대충 겉옷을 하나 걸쳐 입고 가장 가까운 내과를 찾았다. 코로나는 이미 다 지난 줄로만 알았는데, 아침부터 병원에 환자가 많아 좁은 등받이 소파에 불편한 배를 움켜쥐고 앉았다.
“어머니, 김 OO 님 이 시죠. 1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WHAT?? 순간, 지금 뭐라고 부른 거지 싶었다. ‘어. 머. 니?’
주변을 살펴보니 내가 온 병원은 내과와 소아과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설마 이곳에 오는 내 또래의 여성은 다 어머니라 불리는 건가.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 석자 두고 갑자기 소환된 호칭 ‘어머니’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아줌마이긴 해도 어머니는 아니니 정정해 주어야겠다는 욕구가 불끈 솟았다.
몸도 안 좋은데 때마침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예민보스가 출현하는 순간이다.
“저 김 OO 맞는데요. 어머니는 아니에요”
간호사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에 입 주변 근육이 굳어보였지만, 이내 본분으로 돌아가 진료실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간혹 원치 않는 호칭에 꽂힐 때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오는 전화의 텔레마케터는 어머니, 사장님, 고객님, 사모님 등 무슨 기준으로 분류하는지 알 수 없는 호칭으로 나를 부른다.
영혼 없는 텔레마케터의 말에 대답 없이 끊어도 그만인데, 굳이 바로잡아 한마디 하며 전화를 끊는다.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스위치가 탁 켜진 기분이 드는 건 나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탓일 것이다.
“저 어머니 아닌데요”
다른 호칭에는 크게 반감이 없는데, 유독 ‘어머니’라는 호칭에 파르르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라는 호칭의 필수요소인 아이가 나에게는 없다. 아이가 없는 여자에게 타인이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필요요건은 ‘아이가 있을 법한 나이 든 여자’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결국 그냥 나이 든 여자라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린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줌마는 모두 아이가 있을 것이라는 건 오해지만, 아이가 있을 만큼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팩트이니 기분 좋을 리가 없던 것이다.
30대에는 어디에 가도 ‘어머니’라는 호칭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건 내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반증일 수 있다는 걸 체감하고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또 한 가지의 이유는 딩크를 선택한 나의 뜻이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이다.
‘내 시계는 댁들이 생각하는 시계와 달라요. 나는 내 시간대로 갑니다’라는 발끈함이 내 속에서 훅- 터져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40대에 들어서는 부쩍 ‘아줌마=아이엄마’라는 등식이 디폴드인 것 같은 사회적 시선을 느낀다.
더불어 아이 없이 사는 삶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불임이나 난임이기 때문일 거라는 억측이 낳은 측은한 시선 또한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으나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이상 딱히 피할 길이 없다.
특히나 나의 지난날의 히스토리나 가치관, 신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더욱이 묘한 시선을 보낼 때가 있다.
그 또한 나의 선택에서 오는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려니 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선택도 일반적인 다수의 선택만큼 존중받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아이가 나의 선택지에 들어오는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정말 갖고 싶을 때 시도하자’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날이 아직까지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고해진 축에 속하니 나 또한 나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이기적 이게도 아이를 얻음과 동시에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아 보였고, 아이는 좋은데 육아는 하고 싶지 않은 모순된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출산을 경험한 친구나 지인들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결정이 포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가 있는 사람들의 관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딩크의 삶은 아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없는 또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고 그 삶을 얻은 것이다.
비록 아이는 없지만 자유로운 영혼과 함께 살아갈 반려자, 반려견과 함께 하는 삶이 있다.
그 속에는 또 다른 삶의 가치와 시간들이 나를 가득 채워 나갈 것이다.
아줌마이지만 어머니는 아닌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