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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케이 May 10. 2023

단지 후방카메라 하나 없을 뿐인데

익숙한 것의 소중함



나는 몸으로 익히는 것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편이다.

입시미술, 자전거 타기, 스노보드, 운전, 야채 채썰기 등 무언가 몸으로 익혀 체득(體得)하기까지 남들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자전거 타기나 운전, 스노보드처럼 속도를 동반한 '타는 것'에는 특히나 겁을 내는 탓에 배운 지 10년이 넘었지만 잘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20대 초반에 7일 속성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9년간 장롱면허로 묵혔다가 서른 살에 신차로 출시되는 경차를 구매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전을 하고 싶다기보다 차를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귀엽고 반짝이는 열쇠고리 하나 장만하는 것처럼 새 차의 키홀더는 나의 소비욕을 채워 줄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영업사원이 차를 배송해 주던 그날부터 작고 귀여운 나의 열쇠고리는 오랜 시간 애물단지 취급을 받아야 했다.

옆에 차 한 대 없는 주차장에서 어찌나 여러 번 벽과의 싸움을 했던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새 차는 금세 허름한 중고차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의 첫 차는 운전에 익숙하지 못한 차주를 만나 1년여를 고생하다가 헐값에 중고시장으로 가게 되었다.


나의 첫 차를 팔고 난 뒤 남아있는 남편의 SUV는 경차에 비해 차체가 커서 운전에 자신 없는 나를 더욱 위축시켰다.

꼭 필요한 날이 아니면 남편의 차를 운전하는 대신 대중교통을 선택할 만큼, 내가 남편의 차를 운전하는 일은 손에 꼽았다.

애초에 그 차에 익숙해져 보겠다는 노력 따위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부천에서 일산으로 매일 출퇴근해야 하는 일이 있어 차가 한대 더 필요하게 되었다.

나의 형편없는 운전실력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준중형 중고차를 알아보았다.

2년 차의 연식에 차량의 옵션이 경차의 수준과는 사뭇 달랐다.


"오~~ 후방카메라!! 주차할 때 뒤는 문제없겠네"


먼저 떠나보낸 경차에게 잔뜩 스크래치 냈던 기억이 떠올라 나의 부족한 공간감을 채워줄 후방카메라는 더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첫차에게 붙여주었던 것처럼 나의 두 번째 차에게도 '깜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나는 금세 깜시가 좋아졌다. 매일 왕복 60km를 함께하니 차츰 나의 운전실력도 느는 것 같았다.

깜시는 5년 동안 나의 소중한 발이 되어주고 있다. 이제 장거리 운전이 아니라면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며칠 전 깜시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바로 매립형 내비게이션 액정이 먹통이 된 것이다.

내비게이션 액정은 길 찾는 본래의 목적뿐만 아니라 후방카메라를 송출하는 모니터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뒤통수에 눈을 잃은 것만 같은 막막함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나는 남들 다 쓰는 휴대폰 어플 내비게이션을 두고도 단지 액정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매립형 내비게이션을 선호하는 사람이라 답답함이 커졌다.



먹통이 되어버린 내비게이션 액정



휴대폰으로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키고 자동차 정비소로 가서 설명을 하니 액정이 나간 것 같단다.

액정 교체비는 무려 35만 원.

내비게이션을 새로 사도 그 정도 하겠다 싶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을 나를 보고 정비소 사장님은 매립형은 단순히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블루투스, 오디오, 후방카메라 등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비싼 것이라 덧붙여 설명한다.

생각보다 높은 교체비용에 '바꿔? 말어?' 내적 갈등을 반복하다가 이내 후방카메라의 순기능에 대해 머릿속에 나열해 본 뒤 합리적인 소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근처 카페에서 한 시간을 기다린 뒤 다시 영롱하게 눈을 떠 줄 깜시를 생각하며 공업사로 도착했다. 그런데 사장님의 표정이 영 개운칠 않다.


"사장님, 수리 다 됐나요?"

"아니요. 지금 원상복구 해둔 상태인데요. 액정을 교체했는데도 잔상이 남더라고요. 액정이 아니라 기판의 고장일 수 있는데, 저희한테 기판의 재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원래대로 두었어요."

"그럼 액정과 기판을 모두 교체해야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네. 기판을 교체해 봐야 어떤 게 문제인지 알 수 있는데 지금 확인이 불가능하네요."


기판만 고장이 났을 경우에는 얼마이고, 둘 다 고장 났을 때는 얼마인데 재고가 도착하려면 3주가 걸린다는 등의 사장님의 부연설명은 와닿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 내비게이션 모니터는 깜깜한 상태인 데다, 무려 3주간 이 상태로 운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곤란할 뿐이었다.




몇 년 전 안과에서 이른 노안으로 판정되었을 때 나는 마치 장애를 얻게 된 기분이었다.

서른 중반에 노안으로 활자를 읽어야 하는 모든 일에 돋보기안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다.

기본시력은 1.0이라 먼 거리의 사물과 글자는 또렷하게 보이고, 앞에 있는 사물만 흐릿하게 보이는 증상은 눈의 피로도를 더 가중시켰다.

서서히 시력이 떨어지면 적응하기가 쉬울 거라며 조금 일찍 왔을 뿐 누구나 노안은 찾아온다는 의사의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질 않았다.

그저 오래도록 눈을 보살피지 못하고 혹사시킨 탓이니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침침해진 눈에 적응기를 거쳐 이제는 이렇게 글을 쓰거나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모든 일에 돋보기안경을 쓰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이토록 자연스러운 것, 익숙한 것과의 이별은 얼마나 사무친 일인가.

공업사에서 돌아오는 길 어두워진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며, 그간의 고마움을 깜시에게 표현했다.

'깜시, 5년간 내 발을 대신해 줘서 정말 고마워. 그동안 고생 많았어. 너도 나처럼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내가 고쳐줄 테니까 3주만 기다려'

곁에 있어 익숙한 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은 지 오래된 것 같다.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과 반려견 보리, 포근한 집과 나의 발이 되어준 차, 사계절 변화무상한 계절, 맑은 하늘, 나의 노트북, 건강한 나의 몸.

쓰다 보니 당연한 감사함은 의외로 많다.


3주 뒤 깜시에게 액정을 새로 교체해 주면 두 눈 없이 운전하는 것 같은 갑갑함에서 해방이 될 것이다.

또다시 익숙함에 감사함을 놓쳐버리는 간사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오늘만큼은 '있음'에 주목하는 내가 되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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