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알아듣지도 못할 개아들을 향한 나의 세레나데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 말고도 같은 음을 개사한 다양한 버전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자주 창작되곤 한다.
보리를 위한 노래를 만들겠다고 의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구 오구~ 내 새꾸 이쁘지~’ 정도의 나의 혼잣말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어느새 라임이 더해지고 점점 길이가 늘어나더니 끊임없이 노래할 수 있는 지금의 돌림노래가 되어버렸다. 요즘 노래로 말하자면 마치 후크송의 후렴구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의도하지 않은 채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어서 내가 언제 이 노래를 만들게 되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왠지 모르게 부르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 노래는 원래 나만의 비밀스러운 노래였다.
아무리 팔불출 개 엄마 라고해도 사회적인 시선은 부끄러워서 집 밖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건 스스로 금기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보리와 둘이 있을 때 주로 불러주던 노래였는데, 자주 부르다 보니 남편 앞에서도 흥얼거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느 날 남편이 보리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아마도 남편은 나처럼 자신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도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리와 눈높이를 맞춘 엉거주춤한 자세로 보리를 쓰다듬으며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은 평소 반듯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살짝 엉성해 보여 갑자기 빵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게 바로 거울효과인 건가.
‘진짜 팔. 불. 출 인데?’
남편은 보리와 함께하기 전까지 나처럼 동물을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생명체는 본래 그만큼 귀여운 것’ 정도로 생각하는, 동물과 지극히 보편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보리와 함께 하기 전 먼저 떠나보낸 아이(반려견 이름이 eye이다)와 함께할 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는 결혼 전까지 친정에서 함께 살아서 나에게는 동생과 다름없는 개였는데, 아이를 대하는 남편은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뿐 지금처럼 애정을 쏟는 모습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
지금처럼 사랑하는 개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을 그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모습을 보니 오래전 첫째 조카가 태어나 친정아버지가 조카를 안아 들고 흥얼거리던 노래가 생각났다.
그때 친정아버지가 조카를 바라보던 사랑스러운 눈빛이 눈에 선 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마음이 진심임을 그 눈빛은 정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기억에도 가물가물할 나의 꼬물이시절에도 아버지는 그렇게 나를 안고 노래를 불러주셨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에서 뜨거운 게 울컥하고 올라온다.
사랑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그게 비단 같은 종(種)에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조카를 안아 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친정아버지처럼, 팔불출이 내력인 딸과 그의 남편까지도 사랑하는 개를 향해 노래를 흥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