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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 샤베트 Nov 03. 2020

[해수의 아이]

체험의 영역에 다다른 애니메이션

    우리들은 가끔 서사에 대한 해석이나 이해와는 별개로 서사가 아닌, 이미지나 그 외의 요소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사해주는 영화를 만나게 되고, 이들을 접한 관객들은 영화를 단순한 감상이 아닌 체험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당장 이런 영화들이 뭐가 있었는지 떠올려보면, 놀란의 영화 중 가장 메시지가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 당한 [테넷]이라던지, 진부하디 진부한 서사와 별개로 놓치기 힘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쨍한 태양광이 넘치는 화면들, 한국 영화의 기술적/미적 성취에만 모든 의미를 둔 [가려진 시간]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9월 30일 한국 극장에서 개봉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해수의 아이] 또한 이와 비슷한 부류라고 할 수 있겠다.






황홀한 체험의 영화


    [해수의 아이]는 아마도 올해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 가장 도전적이면서 아름다운 영화일 거라 생각한다. 당장에 [해수의 아이] 엔딩크레딧에 삽입된 요네즈 켄시의 [바다의 유령] 뮤직비디오나 공개된 예고편의 비주얼만으로도 여러 관객들을 극장으로 홀릴 정도이니 말이다. 거기에 음악감독이 히사이시 조라니, 눈과 귀가 즐거운 영화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겠다.


    [해수의 아이]의 배경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흔히 생각하는 바다의 푸른 이미지에 더해 깊은 심해까지 아우르는)바다와 우주라고 할 수 있겠다. 심해의 영역과 우주는 종종 연결되는 소재다 보니 이상할 것 까지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배경이 되는 바다의 묘사는 황홀하다는 표현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낮의 에메랄드 빛 바다, 밤의 짙푸른빛 바다를 비추는 형광 빛의 이미지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는데(특히 3D 기술의 도입으로 더 압도적인 체험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해수의 아이]의 바다는 가뿐하게 [라이프 오브 파이]의 묘사를 뛰어넘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2D와 3D 작법이 적절하게 섞인 다양한 물의 질감 표현은 물론, 각종 바다 생명체의 묘사와 그 사이를 헤엄치는 주연 3인방의 바닷속 움직임은 프레임별로 잘라 간직하고 싶다는 진부한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매 순간 눈을 즐겁게 만든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을 어두운 심해에서 펼쳐지는 눈이 아플 정도로 알록달록한 유사 빅뱅의 묘사는 관객을 압도하는, 가히 체험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 모든 아름다운 화면의 나열은 [해수의 아이]가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애니메이션만이 가능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해수의 아이]는 극장의 큰 화면과 큰 사운드로 체험해야 그 가치가 몇 배는 뛰는 애니메이션이다.






진부하고 빈약한 서사


    영화는 별(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모태라 불리는 바다의 이미지를 동원해 임신-출산을 찬양한다. 환경 문제가 암시되는 바다 생명체들의 죽음이 연달아 발생하는 바다(母)를 배경으로, 바다에서 길러진 소라와 우미가 등장하고, 별(父)이 소멸하며 남긴 운석(정자)를 남성인 소라가 품은 뒤 이를 여성인 루카(난자)에게 전달(정확히는 삼키도록)하고, 루카가 스스로를 다시 모체인 바다(우미)에 전달함으로써 새로운 우주(아이)가 탄생하고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과정을 정말이지 황홀하고 추상적인 화면들로 담아낸다. 그렇게 생명의 탄생 과정을 몸소 경험한 루카는 에필로그에서 동생의 출산 장면을 목격한 뒤 여름방학 동안의 경험을 이해하고 성장을 하게 된다.


    이를 담은 [해수의 아이]는 서사에 매우 큰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인류가 평생을 우려먹은 임신-출산과 (특히 여성의)2차 성징 메타포는 어떻게 이를 표현하던 간에 그 전말이 드러나는 순간 진부하고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당연하게도 생명의 탄생을 우주의 소멸/탄생의 과정을 빌려 표현한 [해수의 아이]의 메인 서사는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해수의 아이] 속 탄생 과정 묘사는 심지어 진부한 메타포를 관객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는 가장 중요한 이 탄생에 대한 메타포의 묘사가 절대적으로 빈약하다. 제작진의 야심이 담긴 하이라이트의 빅뱅 시퀀스는 욕심이 지나치다고 느껴질 만큼 휘황찬란하고 어지럽다. 우주와 생명 탄생의 순간을 꾸며줘야 할 부가적인 폭발/소멸/창조의 묘사들은 너무 길게 전시되고 되려 본래의 목적을 망각한다. [해수의 아이]를 보고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했던 영화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메인 서사의 문제 뿐만 아니라 초현실적인 현상을 둘러싼 ‘어른들의 사정’을 다루는(무려 정부와 군대가 동원되는) 서브 플롯은 러닝타임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충분히 다뤄지지 못해 사족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부와 모의 별거로 인한 루카의 가정사는 에필로그에서 봉합되고 루카의 동생 출산까지 이어짐에도 이 과정에 대한 묘사가 거의 생략됐다. 관객은 도통 루카와 루카의 엄마가 어떤 맥락에서 서사적인 연결점을 지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원작을 보진 않았으나 영화는 한정된 러닝타임으로 인해 원래의 분량 중에서 선택과 집중을 하면서, 여러 서사가 많이 잘려 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결


    빈약하고 진부한 서사는 제작진의 장인 정신이 담긴 미술과 히사이시 조의 음악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크나큰 단점이다. 그럼에도 [해수의 아이]는 충분히 체험해볼 만한 2시간 남짓의 경험이 될 것이다. 애니메이션만이 가능한 미적 표현의 극한을 담은 이 작품을 극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접할 수 있다면, 한 번 경험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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