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그리고 제주살이

수원지방법원에 다녀오고 덧없이 행복했던 날들

by 리븐제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주도 한 달 살기를 꿈꾼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잠깐의 휴식을 갖기에 안성맞춤이기에 나 역시 언젠가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한 결혼 생활과 현실은 너무 달랐고 지쳐있던 상황에 틈이 날 때면 유독 제주도를 찾곤 했다.

도시에서 보는 산과 하늘은 제주가 주는 느낌과는 달랐다. 아마 일상을 벗어났다는 자유로움과 해방감 때문일 터. 제주를 찾을 때면 매번 남편과 함께 가야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운전 때문이었다.

20살 되자마자 면허를 따 놓고는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었기에 겁이 났다. 부부이기에 함께 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지만 혼자 뚜벅이로 다니긴 싫었고 운전할 줄 아는 남편이 있는데 굳이 같이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운전만 하면 더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차일피일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까지 남편이 함께 할 수 없다는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나는 도로주행 연수에 관련해 자동차 운전 전문 학원에 문의 전화를 걸었고 바로 예약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기분을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계획에 맞춰 시간의 흐름대로 다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불편한 상황들.

더 이상 억지로 끌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은 길을 나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누비고 싶었다.


도로주행 연수를 시작했고 남편한테도 운전을 배웠다. 가족한테 운전 배우는 건 아닌 게 맞았다.

어찌나 잔소리를 하고 옆에서 운전대를 잡으려 하던지 선생님이랑 할 땐 잘할 수 있는 부분에도 주눅이 들었다. 제일 힘들었던 게 차선 변경이었다. 앞으로 가는 것도 힘든데 앞, 옆, 뒤를 다 보고 해야 한다니 오 마이갓.

생각보다 나는 겁이 많았다. 그야말로 겁쟁이였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날을 잊지 못한다.

장롱면허 탈출 한 지 일 년이 넘어가는데도 유독 혼자 고속도로 타는 게 늘 두려웠는데 뜨거운 대낮에 40분 남짓한 거리를 혼자 해냈다. 출발하기 전 긴장감으로 중간쯤 갔을 땐 이미 멈출 수도 없다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었고 어느덧 운전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스스로에게 미션과도 같았던 일을 두려움과 맞서 싸워 이겼다.




전세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우린 각자의 보금자리로 이사를 마쳤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상황이 들어맞고 일처리가 진행되어 신기했던 지난날이었다. 헤어짐을 약속했기에 이 참에 몸도 마음도 쉴 겸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준비했다. 너무나도 애정하는 공간에서 일을 내려놓고 떠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죽을 만큼 몸이 아프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제주도로 떠나기 하루 전 날.

우리는 함께 수원지방법원으로 향했다. 서류 접수 확인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금방 끝날 일이라니,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는데 겨우 몇 분만에 빠르게 정리되는 관계라니 참 아이러니했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다 점점 뿌옇게 변하더니 이내 곧 눈물이 앞을 가렸다. 멈출 수 없을 만큼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동안 참 많이 울었고 더 이상 흘릴 눈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꺼이꺼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목 놓아 울기로 작정하고 모든 걸 쏟아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다독여주는 눈물이었다. 울고 나니 한결 편해지고 속이 시원해졌다.




여행의 시작, 평소 같았으면 일하는 시간에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에 앉아있다.

날씨부터 나를 축복하고 축하하는 듯했다. 제주로 향하는 하늘의 맑음이 그간의 힘듦을 싹 씻어내주는 기분이었다.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 감사일기를 적고 명상을 하며 정해놓은 아침 습관들을 이어나갔고 자유로운 방랑자처럼 제주의 남서쪽 곳곳을 누볐다. 때론 제주의 풍경에 넋을 잃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한경면 고산리부터 서귀포시 대정읍까지 길게 이어지는 노을 해안도로는 출퇴근하듯 하루의 마무리를 그곳에서 보냈다. 해안도로 위를 달리며 돌고래도 보았고 노을 지는 순간엔 행복함에 겨워 눈물도 찔금 났다. 매일이 선물 같은 시간에 자연에 위로받는 나날이었다.


가끔은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에겐 상처뿐이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엔 사랑받기를 원했던 내가 보였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과거의 생각들이 가끔은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기대를 바라지 말자. 모두가 나를 사랑할 순 없다는 걸 인정하자.

그렇게 받아들이는 순간 내 마음에 박힌 돌이 빠져나갔다. 지금부터 사랑을 바라기 보단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토닥토닥하며 나 스스로를 제일 사랑해 주고 아껴주면 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제주에 입도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후 두 달 뒤 집과 일자리를 구하러 제주에 다녀왔다. 하고 싶었던 일이 많았기에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왜인지 일은 어그러졌고

그때 나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던 사람 덕분에 새롭게 매장을 오픈하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X도 나로 인해 많이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제주도를 다녀와 그 후로도 몇 개월간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시간을 가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 공간을 지키며 일했던 X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티를 내거나 말을 하지 않는 성격임을 알기에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힘든 시간을 버텼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