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들 _ 인터뷰 6
요즘 우리들이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순수 문학은 죽었다는 말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범람하는 콘텐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휴대폰 하나면 영화를 보고, TV를 시청하고, 책을 읽는다. 좁은 책방에 쪼그리고 앉아 시를 읽고, 용돈을 모아 시집을 사던 그런 과거의 아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문학은 결코 죽지 않았고, 대중 속에서 같이 살아 숨 쉬고 있고, 세상과 소통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은경 박사는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이번에 [내가 만난 사람들]에서는 문학으로 세상을 소통하는 여류시인이자 문학박사인 지은경 박사님을 찾아갔다. 많은 시집과 책들로 빼곡히 쌓여있는 그녀의 신문예 사무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문학을 사랑하고 시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는 그녀가 참 멋있어 보였다. 출판하고 있는 월간 신문예 잡지책을 직접 편집을 하고, 교정을 본다. 곧 70을 바라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운 자태와 컴퓨터 활용능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을 평생 업으로 생각하며 부조리한 한국 문학의 현실에 도전하며, 누군가에게 소리 없이 길을 내어주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나는 8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38 이북 황해도 출신의 강인한 성격을 지니신 분들이다. 불행하게도 딸만 내리 다섯을 낳으신 어머니는 남존여비사상을 가지신 분이었다. 한 세기 전, 그 시대의 많은 어머니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어릴 때부터 ‘배반의 출생’이라는 고민을 안고 나는 성장했다. 그것은 우리 가정만의 문제가 아닌 학교나 사회적인 문제로 연결되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여성의 존재’의 문제가 언제나 따라다녔다.
그것이 나의 철학과 문학으로 통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인 이근배 선생님을 만나 것은 운명이었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문단에 입문하게 되었다. 데뷔는 시작에 불과할 뿐, 공부는 자기 스스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전력 질주하여 예술학 석사, 문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학위논문은 페미니스트 시인 ‘최승자 시 연구’가 이미 예정돼 있었다. 그 후 잡지사를 운영하며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 노력했지만, 혼자만의 생각으론 전달되지 못해 감동받지 못했다. 그러한 현실들이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창작으로 위안을 받곤 했다. 1987년 ‘보리수 시낭송’에서 ‘자화상’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했다. 30여 년 동안 12권의 시집, 평론집, 2권의 칼럼집, 1권의 에세이집, 30여 권의 엮저서가 있다. 1980년도에 창간된 ‘신문예’ 문학잡지는 2003년에 인수하여 15년째 발간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잔혹할 수 있는 게 사람이었다. 여성에게 여성이 더 잔혹했다. 문학은 세상을 읽는, 인간을 읽는 창구였다. 문학은 불가해한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곳이었다. 정신 작업인 문학은 자기의 생각을 언어로 표출하면서 진정한 인간으로 돌아가는데 용기를 주었다. 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공감능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했다. 급변하는 미래사회에 적응하고 공존하려면 공감을 키워나가야 한다. 문학이 그러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결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재능이 문학밖에 없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 현실에 좌절하여 도저히 삶을 더 이상 견디어 낼 수 없었을 때 시가 나를 찾아왔다. 시는 보잘것없는 나를 한없이 품어주고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 세상에 대놓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할 수 있게 해 주고 다 들어주고 용서해 주고 희망을 주는 시는 내게 신앙과 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나 자신에게 고백한다. 시에 순교할 수 있다고.
나의 시는 진실의 표출이며 외침이다. 정의를 위한 눈물이며,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상처의 결정체이다. 내가 낳은 시들은 모두 평등하고 공정하게 사랑하는 내 자식들이다. 어느 시가 더 좋다 덜 좋다 하는 것은 단지 독자의 몫일뿐이다.
한국문학은 남성우월주의 문학이다. 지금은 외피적으로 사회가 변한 듯 보이지만 처음과 별로 나아진 것은 없다. 가부장적 남권주의 속에서 여성들은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로 살아왔다. 대표적 역사적인 여성이 나혜석, 김명순 등의 작가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문단의 여성작가는 꽃이요 남성의 배려로 약간의 빈 의자를 양보받았을 뿐, 중요 자리의 대부분은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부당한 문단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남성들의 그늘에 들어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 잘되면 된다는 기만이요 이기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행위로 자율성 결여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은 약자들이 힘을 합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래되고 일상화된 행위들은 비겁하고 나약한 여성들로 만든다. 여성들이 힘을 뭉치는 강력한 사회적 저항이 없이는 결코 불평등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나의 이상은 평등이 핵심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도 실력을 키우며 자라는 싱싱한 순이 꺾일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도전하고 있다.
문학이 죽었다? 시의 몰락?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문학의 위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학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들은 시에 열광하고 있다. TV 광고 문구나 현수막 문구들을 보라 온통 시구들이다. 지방에 가보면 시낭송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대중들은 시구 한 줄에 감동하고 감탄한다. 앞으로 미래 사회는 대화도 시적으로 할 것이다. 지금은 문인 2만 명 시대이다. 전통적인 순수문학만을 외쳐선 안 된다. 21세기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학문은 물론 모든 경계가 무너져 융합하는 시대이다. 순수문학은 대중문학을 받아들여 융합을 모색해야 한다.
인문학은 지성의 배양이다. 지식은 풍부한데 지성이 미약하다. 인문학은 인간학으로 말할 수 있다. 지성을 함양하기 위해 인문학을 ‘인간과 철학’으로 명제를 대체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철학은 삶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성찰을 하게 한다. 미완의 인간은 성찰을 배제하면 괴물로 변하기 쉽다. 지혜와 진리를 사랑하며 논리를 키우고 지덕체를 키우는 철학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롤모델이 될만한 존경하는 스승을 갖지 못한 것은 불행이다. 그러나 나의 제일 큰 언니가 모델케이스가 된다. 최고 학부를 나온 언니는 지금 80대 중반으로 현재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 가정 해체 시대에 3대가 한 가정을 이루어 아름답게 살고 있다. 전쟁을 겪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음인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회생활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세상과 사람을 긍정적으로 대하며 포용하는 지혜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여 나의 롤모델에 부족함이 없다.
임마누엘 칸트의 3대 비판서이다. 인식능력에 관한 순수 이성 비판, 윤리학의 최고 원리인 실천이성비판, 사물의 개념에 대한 판단력 비판이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인간에 관한 인문학의 정수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최고의 선인 도덕 법칙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 인간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어떤 가치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답을 얻을 수 있다.
인과론의 법칙에 의해 산다. 우리의 일상이 우연이 아닌 원인에 의해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므로 항상 바른 식견과 행동을 갖고자 스스로에게 규정을 지어놓은 것이다. 부주의와 타성에 젖은 적당주의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겸손의 정신, 배려의 정신, 면학의 정신, 나라사랑 정신, 봉사의 정신, 상생의 정신, 공경의 정신, 청렴의 정신 등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자 끊임없이 일상을 갈고닦으며 노력한다.
나의 계획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에 가교를 놓는 것이다. 개인적인 문학세계의 방향은 ‘극서정시’ 계열로 나가고자 한다. 극도로 정제되면서 소통이 가능한 서정시는 디지털 시대정신에 맞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최근작 중 「벚꽃나무 아래에서」 전문 “숨이 멎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급소를 찔렸나 봐” 만개한 벚꽃에 황홀한 마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열 개 미만의 단어로 충분히 독자와 소통될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늦은 때란 없다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이다. 데뷔도 박사학위도 남보다 10여 년씩 늦었다. 대한민국은 학연, 지연, 혈연 등 연고주의 문화지만 끊임없이 공부하며 도전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 왜, 세상은 분명 바뀌어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절망은 자기 함정이다. 결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내일이 있으니까 오늘 잘못됐다고 낙심할 필요 없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이슬같이 순결한 내일이 우리에게 항상 다가오고 있다. 그 내일을 위해 하루하루 중요한 느낌들을 기록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좀 더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조금씩 실천해 나가고 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을 나는 존경하지 않는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먼저 봉사하는 것을 실천하고자 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에서 경제는 상위에 속한다. 이제 문화의 발전에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말이다. 그중 하나가 예술이 생활이 될 것이다. 예술의 어느 한 장르를 선택하여 사랑하며 일상이 되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예술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 예술에는 특히 문학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목적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생즉사 사즉생
지은경
어려울 게 없는데
어렵게 사는 것은
미물微物로 태어나서
미물美物로 살고 싶기 때문
밖은 7 안은 3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자비롭거나 무자비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오, 내 마음 어쩌지 못해
몰라서 저지르는 죄
알면서 저지르는 죄
미물이라 부르는 이는 사람뿐
벚꽃나무 아래에서
지은경
숨이 멎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급소를 찔렸나 봐
요즘 다시 시를 끄적인다. 오랜 침묵을 깨고 내 안의 만나는 시간...
지은경 박사님의 문학 히스토리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한국 문단에서 30여 년을 여류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사회 곳곳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배척하며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 반기를 들었다가는 어떻게 보면 소리 없는 퇴출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은경 박사님을 보면서 오랜 시간을 자신과의 싸움을,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를 원하며 문학을 통해서 소리 없는 외침을 지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은 세상을 연결하는 소통의 도구이며, 공감능력을 키워주는 훌륭한 도구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가 않다. 이런 세상에 절망할 시간도 없고, 누구를 원망하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해 보이고, 세상이 변해야 미래를 살아가야 할 우리 아들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국 문학이 세계에 우뚝 서는 그날을 꿈꾸며 [내가 만난 사람들] 문학으로 세상을 연결하는 여류시인 지은경 박사님 편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