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6일 뮌헨. 렌바흐하우스
뮌헨의 태양이 점점 말갛게 하늘 뒤로 물러난다. 돌길 위를 낮게 구불거리던 노랑의 광선들도 하나 둘 빛조각 파편으로 끊어지다가 마침내 땅으로 스미듯 사라진다. 고향과도 같은 도시인데 일정이 너무 짧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나의 이번 뮌헨 체류가 짧아진 것은 프라하 일정을 갑자기 끼워 넣어서지만, 한켠에는 4년이나 살았는데 왠만큼 볼 건 다 봤잖아?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아까 음대에 악보를 찾으러 가면서 보니, 다 보긴 뭘 다 봐! 싶은 기분이 불쑥 솟아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렌바흐하우스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뮌헨아, 미안하다. 내가 잠시 주제 넘었다.
조금 전 산책 때 본 천사장 미카엘의 조각상처럼, 렌바흐하우스 역시 공사 때문에 유학 시절 동안 보지 못했었다. (지난 2013년 공사가 다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저택의 모습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 곳의 칸딘스키 콜렉션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칸딘스키는 많은 이들에게 '뜨거운 추상'이라는 말로 각인되어 있다. 주로 색채의 흐름과 역동성, 구상성을 탈피하는 에너지 등과 같은 말로 그를 설명하곤 했던 것 같다. 그리곤 기하학적인 구획과 분절이 특징인 '차가운 추상'의 몬드리안과 비교했던 것이 기억난다. 존재는 언제나 다른 존재에 기대고 있는 터라 비교의 방식은 늘 어떤 존재를 설명하는데 있어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사실 한 존재가 비교되거나 설명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설명을 통해 그 존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한 존재를 더 잘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 존재와 더 흡족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존재에 더욱 걸맞는 이해의 방식은 함께 겪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언어를 넘어서는 더 높은 차원이다. 그래서 어떤 높은 차원의 겪음들은 때로, 말이 없다.
그렇게 많이 알고 싶어 하고 그렇게 많이 배우는데도 똘똘이 스머프 이상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면, 그건 존재의 본질을 억압하면서 설명과 이해를 강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대화와 겪음의 과정이 결여된 이론은 존재를 박제화 시킨 것과 같다. 겪음의 직접성을 자꾸만 상실하게 만드는 디지털과 테크놀로지의 위압 또한 일종의 화려하기 그지 없는 박제 기술인지도 모른다. 물론 가상 체험을 구현해주는 기술 자체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술이 겪음의 진정성을 희석시키지 않도록 정신의 날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그 좋은 기술들로 인해 진짜 겪음을 업신여기게 된다면, 다음 번엔 그 기술이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눈으로 내 귀로 내 몸으로 직접 겪는 것은 중요하다.
칸딘스키의 그림도 그러했다. 그의 그림 앞에서 나는 별로 붙일 말이 없음을 느꼈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자유를 내 말로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규정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굳이 말에 가두고 싶지 않다고 할까. 그대신 온 몸과 감각을 열고 그의 색채의 혼합과 획의 기운을, 그리고 그것이 펼쳐져 있는 공간에 속해 보는 상상을 하고 싶었다. 내가 캔버스 밖에 서서 그림 안에다 내 시각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칸딘스키의 화폭 안에 들어가 그 색에 함께 물들고 붓터치의 기운에 내 몸을 부딪혀 보고 싶은 것이었다.
이 그림의 의미가 무어냐고 물어도 좋으리라. 하지만 의미에 관한 물음을 그저 묻어두어도 좋으리라.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라 하여 그것이 덧없는 것은 아니다. 저 빛깔과 형상은 아무런 이름표나 표식이 없이도 나의 가슴을 채운다. 굳이 무엇을 닮았느니 무엇을 연상시킨다느니 하는 말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런데 때로는 사랑에도 그와 같은 순간이 있다. 물론 사랑의 말은 흔들리는 마음을 붇돋아주고 흩어지는 용기를 붙잡아 준다. 그러나 사랑보다 말이 앞서는 순간, 말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랑하는 이를 규정하거나 가두거나 윤색하거나 이상화하거나 자기 증명을 위해 도구화하거나 혹은 그와 비스무리한 여러 얼굴의 거짓에 봉사할 위험에 노출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말을 거두고 그보다 더 직접적이고 진실한 사랑의 표현들을 떠올리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종종 있다. 몸의 기억이 머리의 기억보다 더 진실하다. 그의 온기와 그의 감촉과 그의 냄새, 그리고 손끝으로 그와 그가 점유하고 있는 세계의 경계를 더듬을 때 느껴지는 그 사랑스러운 존재감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의 코끝에 감도는 생령과 그의 검음이 깊은 눈 속에서 끝없이 반사되는 나 자신와 그의 황홀한 공존을 더 가까이 느껴보는 것이다. 말은 믿을 게 못되어도 몸이 기억하는 그의 전체적인 모습은 - 혹은 그와 내가 함께 공유했던 공간에 대한 기억은 - 말을 넘어서는 가슴 뭉클한 심연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뭔가 굉장히 거창하게 썼지만 실은 앞에서 말한 것들은 또 이런 것들이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보다 청소를 해 주는 것. - 꽤 많은 아내들이 남편이 청소할 때 섹시함을 느낀다고 한다! - 혹은 냉장고 속에서 잊혀진 것에 대한 앙심으로 자체 발효를 진행중인 상한 식재료를 대신 치워주는 것. 혹은 즐거운 이야기를 곁들인 안마로 몸의 끝자락들에서 정체 중인 피와 숨의 소통을 조금이나마 틔워주는 것. 그가 비 오는 날 더 땡겨하는 게 크림 베이스 파스타인지 토마토 베이스 파스타인지를 기억하는 것. 혹여나 실패한 음식을 대신 먹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한편 이 곳에서는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의 그림도 만나볼 수 있다. 그녀의 그림에는 진짜 겪음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칸틴스키를 겪은 사람이었다. 칸딘스키의 제자였다가 곧 그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칸딘스키가 이미 러시아에서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무르나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예술과 삶의 동반자가 된다. 그들은 또 튀니지와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여행을 함께 했는데, 이 시기 칸딘스키와 뮌터는 모두 예술적으로 커다란 도약을 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부부 화가 친구가 있었는데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와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서로를 그렸다. 예술이 연인들과 친구들을 하나로 묶어주었고 같은 지향점을 주었다. 예술은 그들에게 '푸른 기사'라는 이름을 부여해 주었다.
한편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의 가장 인상적인 명작 한 점도 이 곳 렌바흐하우스에 있다. 댄서 알렉산더 샤로프의 초상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누군가에게서 저런 미소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곧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은 얼핏 보면 오만해 보인다. 그러나 그 눈에는 세상을 얕잡아 보는 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열정이 이글대고 그 붉은 입술의 미소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엿보인다.
이들은 모두 기존 화단의 도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표현주의의 길,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간 추상화의 길을 걸어갔다.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는 자신만만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진지했고 그들의 이상은 높았다. 아마 그들은 모두 초상화 속 샤로프가 짓고 있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들이었으리라. 이들이 기존의 화성음악적 질서를 거부하고 12음 기법, 즉 음렬의 세계를 열어젖힌 아놀트 쇤베르크와 깊은 공감을 나눴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기말의 불안과 전쟁의 암운이 드리워진 시대, 서로 상반된 진영들 사이에 대립과 적대감이 첨예화되던 시대, 이들은 어떻게 더 나은 환상의 세계를 꿈꿀 수 있었을까?
'푸른 기사'. 푸르름이란 낭만주의의 상징이자 생명을 소생케 하는 밤의 상징, 영원한 창조성의 상징인 색이다. 희망과 환상의 색이 바로 푸른색이다. 전통적인 낭만주의가 보여주는 푸른꽃이나 파랑새 역시 영원히 진전되는 예술적 이상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칸딘스키, 뮌터, 야블렌스키 등이 중심이 된 '푸른 기사' 그룹 역시 푸르름의 이상향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푸른색은 꽃이나 새가 아니라 기사, 즉 말로 표현되고 있다. 희귀하여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 그래서 일종의 신의 계시처럼 주어진다는 신비로운 푸른꽃이나,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 수 없고 날개 없는 인간의 처지로는 날아와 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파랑새보다는 푸른말의 이미지는 보다 주체적이다. 푸른 기사는 푸른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정처없이 떠도는 행운을 바라는 처지가 아니다. 희망을 향해 내달릴 수 있다. 그 때문에 프란츠 마르크의 그림은 푸른 말은 그래서 푸른 기사 그룹을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다.
하지만 연인들과 친구들을 갈라놓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1914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터진 것이다. 독일과 러시아는 서로 적국이 되고 만다. 독일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칸딘스키와 뮌터는 스위스로 피신한다. 하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자 칸딘스키는 뮌터를 남겨두고 러시아로 돌아간다. 1916년 그들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마지막으로 재회하지만 그들은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 야블렌스키는 스위스로 망명하여 1921년 이후에야 독일에 돌아온다. 푸른 말을 그린 화가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같은 보다 젊은 화가들은 전쟁에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푸르른 꿈과 희망이 검붉은 쇠붙이의 포화에 찢겨지고 만 것이다.
40여년이 흐른 1957년, 나이 여든이 된 가브리엘레 뮌터는 렌바흐하우스에 작품을 기증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지나갔다. 무수한 불폭탄이 날아들었다. 뮌터는 작품을 지켰다. 그녀의 기증품은 1901년부터 1914년까지 나온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들, 친구들의 작품들, 그리고 자신의 작품들이었다.
전쟁과 운명이 그들의 삶을 갈라놓았지만, 그녀는 삶의 한 굴곡을 함께 겪었던 칸딘스키를 기억했다. 뮌터는 그 기억을 지켜내는데 아마도 삶을 걸었으리라. 우리가 지금 그를 겪어 볼 수 있는 것 또한 모두 뮌터의 덕이다. 렌바흐하우스는 뮌터의 기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한 기념현판에다 담아 놓았다. "그녀의 기증 작품은 렌바흐하우스의 '푸른기사' 컬렉션의 주춧돌이 되었다."
렌바흐하우스에는 또다른 거장인 파울 클레의 명작들도 많이 있다. 그 중 내 눈길을 특히 사로잡은 것은 '파괴된 곳'과 '천사장'이다. 이 두 그림은 서로 약 18년의 격차가 나는 그림답게 클레 작풍의 변화를 극명히 보여준다. '파괴된 곳'은 전쟁의 스산함을 강렬히 풍긴다. 푸른 인광을 연상시키는 음침함이 빈집에 뚫린 검은 구멍과 망자의 표식을 채우고 또 에워싼다. 하지만 천사장은 어떤까. '천사장'이라는 제목이 없다면 누가 이 그림이 그것을 '표현'했다고 여길 것인가. 그러나 제목과 무관하게 이 그림은 이미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그 역시 표현주의에서 추상화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클림트의 유디트를 연상시키는 프란츠 폰 슈툭의 '살로메'도 있다. 클림트의 유디트가 반생명과 반죽음의 정적 상태로 연출되었다면 살로메의 경우에는 춤추는 여인의 동적인 움직임이 퍼런 서슬로 드러나 있다. 나는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텍에 있는 슈툭의 또 다른 명작 '죄'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푸른 기사'. 이 이름이 내 마음 속에 새겨졌다. 조금이나마 그들의 삶과 꿈을, 사랑과 이별을, 엿보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들의 이상향, 그리고 이를 무참히 깨버린 세기말의 불안과 광기가 한 번은 환상을 떠도는 말간 푸르름으로, 한 번은 포효하는 시퍼런 서슬의 검푸름으로 내 망막 위를 지나간 것만 같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는 아직 나 역시도 그들만큼 파릇파릇했던 시절에 배운 시 한 편이 떠올랐다. 그 시의 시인은 게오르크 트라클. 푸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세계 1차 대전을 겪었고 그 때 희생된 푸르렀던 시인이다. 그 시대의 푸른 꿈에 대한 일종의 진혼곡처럼 이 시를 읊조려도 좋을 것 같았다.
사로잡힌 지빠귀의 노래
나뭇가지 속의 어두운 숨결,
파란 꽃조각들이, 고독자의 얼굴과
황금의 발자욱들을 떠돈다
감람수 밑에서 죽어가면서
취한 날개짓을 푸드덕거리는 밤
그토록 조용히 겸허는 피흘린다
꽃피는 가시관으로 천천히 이슬 떨어지고,
광채 뿜는 팔의 긍휼 이제
부서지는 가슴을 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