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오스트리아 빈 - 벨베데레 하궁
민수 씨가 아침을 차려준다. 아내는 준비에 시간이 걸리니 급한 놈이 우물 파는 것 뿐이란다. 훌륭한 친구다. 식기도 때 잠시 반성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별로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한 적이 없다. 그래도 요리 말고 딴 건 열심히 하잖아, 생각해 보아도 궁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얼른 창밖을 보니 뾰족한 삼각형들이 늘어선 유럽식 지붕. 한가로운 골목을 흐르는 고요. 여기가 유럽이 맞구나 싶다.
고민하다 벨베데레 궁전에 가기로 했다. 벨베데레 궁전은 상궁과 하궁으로 나눠져 있는데 상궁에는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와 "유디트"가 있다. 상궁만 보고 나갈까 하며 들어왔는데 하궁의 기획전이 너무 좋다.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 그리고 여인들"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기획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다르게 보고 어떻게 다르게 그렸을까? 그들의 붓에서 피어난 여체는 세기말 빈의 불안과 환락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인상적이었던 것은 화가의 모델이었던 여인들의 삶이 매그림마다 간략하게나마 소개되어 있었던 점이다. 글들은 대부분 1인칭 시점으로 쓰여져 있었다. 일종의 저항의 몸짓으로 쓰여진 언어였다. 그 글은 그림 속 여인들이 그저 그림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들은 천재의 재능을 빛나게 해주는 시각적 이미지나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삶이다.
삶은 대상화를 거부한다.
클림트의 여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황금새장과 금속의 반짝임이 여체를 가둬 놓는다. 황금새장의 화려함이 강렬할수록 희멀건 여체는 더 투명해지고 육체성을 잃는다. 붙잡지 않으면 금세 휘발해 버리는, 여성의 형상을 한 어떤 비현실적인 존재를 황금과 금속의 족쇄로 가두어 영영 고정시킨듯 하다. 그래서 클림트의 여인들의 시선은 갇혀 있다. 화려한 장식에서는 폐쇄성과 폭압성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겨우 가두어놓기만 했을뿐 금속은 여체를 결코 정복할수 없다. 여체는 금속화되지 못한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보이는 금속과 여체의 이 극명한 대조는 둘 사이의 긴장감과 저항을 잘 드러낸다.
금속이 남성성이 이룩한 문명의 정점을 상징한다면 여체는 문명으로 침범할수 없는 신비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클림트의 그림에서 문명의 시간은 멈춰져 고정되어 있다. 여체의 황홀경은 순간이지만 영원을 향해 뻗어나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클림트의 그림은 신화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에곤 쉴레는 근육질의 유령이다. 그의 육체는 자유로운 대신 그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적막하여 발 붙일 곳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쉴레의 그림도 클림트처럼 갇혀 있는 것이다. 발 붙일 곳이 없는 세상에서 누리는 자유란 실은 무관심과 방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쉴레의 캔버스는 클림트와 달리 시선을 열어주지만 그것이 외려 보는 이를 막막하게 한다. 클림트에게서 금속 장식이 두드러진다면 쉴레에게서는 잿빛이 두드러진다. 형상적으로는 육체성을 잘 보여주는 인물들의 낯빛에는 거의 잿빛이 서려 있다. 근육과 뼈가 선명하게 묘사되지만 피는 흐르지 않는듯한 느낌이다. 아니면 붉은 피가 아니라 회색 피가 흐르는 것일수도 있으리라. 쉴레의 여인들이 황홀경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보인다. 신화적 요소는 배제되어 있고 여인들의 시선은 현실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어쩌면 숼레는 문영에 대한 상징을 콘크리트에서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나에게 새로운 기쁨이었다. 금속성과 무채색의 세계와는 또다른 온기, 열기가 그의 그림을 굽이쳐 흐른다. 형상은 짧고 굵은 붓터치로 성글게 묘사된다. 이렇게 모호한 형상을 보완하는 것은 유화 특유의 색채 혼합으로 인한 명암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은
선이 아니라 덩어리고
형체가 아니라 에너지고
구조가 아니라 열기다.
연작으로 보이는 두 개의 그림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노예와 함께 있는 여인인데 붉은 노예가 주인 여자 뒤에서 어깨에 손을 대고 있다. 다른 하나는 노예 여자인데 주인인듯 보이는 남자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노예는 붉다. 주인은 희다.
단순히 백인 주인과 유색인 노예의 그림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채도가 높은 붉은색에 지배를 받는 노예 쪽이 흰 빛깔의 주인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도 더 삶에 가깝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갔다. 승연이 또래 혹은 그보다 한두살이나 많아 보이는 아가들이 그림을 보러 왔다.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는데 그래봐야 눈은 어디 있어요? 그럼 코는?
뭐 이런 정도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망울은 더없이 반짝거린다.
우리들도 이중섭을, 박수근을, 오윤을, 김기창을 저렇게 쉽게 일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할텐데. . .
나오는 길에 이 기획전에 관한 도록을 구입했다. 안 살 수가 없었다. 이 전시를 본 것만으로도 나의 이번 여행은 벌써 값지다.
전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 속에는 얼마나 많은 환상이 깃드는가. 그 환상이 얼마나 많은 욕심을 낳고 또 얼마나 많은 허상을 만들어내는가. 내가 본 여러 여인들의 모습에는 사실 남자인 화가의 눈이 만들어낸 환상이 함께 들어 있다. 바로 그 환상이 예술을 예술답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그 환상은 예술로 하여금 삶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나의 환상은 이런 것이다. 좀 더 오래가는 문화와 예술의 토양을 우리 땅에서도 일구는 것.
나의 현실은 이런 것이다. 애 둘을 낳고 허덕허덕 살아가는 것.
나의 환상과 현실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애 둘을 낳고 허덕허덕 살아가지만 그래도 즐겁게 사는 아빠를 애들에게 보여주는 것.
지금도 애 둘을 혼자 보느라 정신이 없을, 내 여자인 아내를 그래도 즐겁게 해 주려고 허덕이는 것.
그런 그림을 함께 그리고 신나 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