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사람인가? 그렇진 않다. 나는 나쁜 사람인가?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럼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원래부터 있는 걸까. 어릴 적 도덕 시간에 배운 것처럼 사람은 원래 착하거나(성선설), 원래 나쁘거나(성악설), 아니면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거나(성무선악설) 셋 중 하나일까?
내 생각에 사람은 원래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에서 출발해 그가 한 행동의 결과로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거나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원래부터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했다고 해서 그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내가 읽은 책인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의 저자는 미성년자인 16살부터 성판매를 시작한 여성이다. 성매매는 불법이고 성매매는 나쁜 것이라면 그녀는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녀는 나쁜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라는 사람이 좋지 않은 일(성판매)을 했고 , 그 일을 반복해 왔으며,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그녀가 단순히 그냥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녀가 한 행동이 착하고 옳은 일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녀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극단적인 경우지만 그녀의 여성을 산 성매수자 역시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성판매 행위에 가담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고 나쁜 일이다. 하지만 그(혹은 그녀)가 한 특정 행동이 나쁜 것이지 그(그녀) 자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 여기서 누군가가 그럼 세상에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은 아예 없다는 거냐? 하고 물어볼 수도 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이란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의 착한 행동의 총합이 나쁜 행동의 총합보다 크다면 그는 (대체로) 착한 사람일 것이다. 반대로 악한 행동의 총합이 선한 행동의 총합보다 크다면 그는 나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 상관없이 사회에서 특정 사람에게 붙는 착함과 선함의 이름표는 매우 착하거나, 매우 나쁜 한 가지 행동만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언론이나 인터넷 여론 같은 것들이 특정 사람의 착함과 나쁨을 단정적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 나쁜 사람 낙인이 찍힌 사람 중에 억울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착한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 중에도 딱히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떠오르는 예가 몇 있긴 하지만 굳이 적진 않겠다.
추상적인 예이긴 하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한 학생이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고 치자. 그의 경우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라고 낙인이 찍힐 확률이 크다. 하지만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들이 얽혀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쁜 사람, 대표적으로 국내 대형 항공사의 '갑질' 전무 같은 경우 아마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맞을 것이다. 그 사람이 ‘국민 나쁜 사람’이 된 것은 특정한 한 가지 행동이 기폭점이 됐다. 하지만 그 사람의 경우 그 특정 나쁜 행동이 그의 전체 삶과 동떨어진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도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됐던 것은 그의 특정 행동의 총합, 즉 '결과'의 영역이었다. 행동으로 표출된 결과를 보고 상대적으로 착함과 나쁨을 나눈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 가지 커다란 결함이 있다. 바로 특정 행동을 하게 하는 '의도'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도 착한 행동을 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드라마의 클리셰 중에 사랑하는 두 남녀 중 한 명이 죽을병에 걸리고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있다. 의도야 상대에게 짐이 되기 싫고, 좋은 모습만 남겨주고 싶어서라는 선한 측면이 있지만 대체로 결과는 상대에게 더 큰 상처가 되는 나쁜 경우가 많다. 반대로 꿍꿍이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위선을 연기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설혹 나쁜 의도나 선한 의도를 배재하더라도 사람들은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나쁜 행동과 선한 행동을 습관적으로 실행하는 경우도 많다.
내 경우만 봐도 나는 되도록이면 나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착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행동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일련의 행동을 하는 기저에는 단순히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와 같은 목적 지향성은 별로 없다. 그것보다는 내가 나쁜 일을 했을 경우 닥치게 될 귀찮은 상황이 싫어서가 더 크다.
가령 법을 어기는 일이라면 그 행동을 걸렸을 때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 생기고, 윤리적인 수준에서의 나쁜 일이라면 역시나 내 평판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반대로 조금은 번거롭더라도 착한 일을 하면 내 기분도 좋고, 그걸 통해서 만족감도 느끼게 된다.
사람은 사람만이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사람 일반에도 해당하고 사람 개개인인 각각의 '나'에게도 해당하는 것 같다. 사람만이 선한 의도와 행동, 자유의지가 있고, 예술적 감수성이 있다고 믿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믿는 자유의지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허구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착한 본성을 갖고, 착한 행동을 평생 실천해 온 착한 사람이라도 뇌 전두엽에 생긴 단순한 종양만으로 전혀 다른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인간 영혼의 유무가 아닌 뇌라는 기관의 단순한 고장만으로 사람이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 내가 커피를 마시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이런 일들이 단순히 나라는 개체의 자유의지, 즉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이다. 1초를 수백 개, 수천 개의 단위로 분절한 짧은 시간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특정 행동을 하기 전에 뇌신경의 전기적 자극을 통해 그 행동을 사전에 결정하게 된다. 그 신호를 조작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운명적인 만남조차도 심장박동, 호르몬 등의 조작으로 얼마든지 가짜로 만들 수 있다.
또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예술적 성과(모나리자, 생각하는 사람 등등)들 조차도 인간을 넘어서는 월등한 존재가 봤을 경우에 원숭이들이 돌을 가지고 놀거나, 강아지들이 테니스 공을 물어오는 수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즉 인간을 넘어서는 영역의 관점에서 봤을 때 결국 인간도 다른 동물보다 조금 복잡한 함수(알고리즘)의 집합체 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실제로 아직 읽진 않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라는 그의 책을 통해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다룬다고 한다. 인간을 정교한 기계의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뭐 어쩌다 보니 조금 시니컬한 내용이 되어 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냥 사람이다. 조잡한 이성의 갑옷에 숨어봤자 어차피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져 버리면 그냥 바보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결론은 사랑하기 좋은 5월의 첫날 회사에서 당직을 서면 짜증이 나고, 데이트를 하고 싶지만 상대가 없으니 차라리 휴일 수당이나 벌면 좋지 않을까 싶다가도, 어차피 휴일 수당도 쓸 데가 없으니 의미가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