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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Jul 01. 2022

누운 배 by 이혁진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99p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쓰러졌다. 거짓 같은 참이다. 그 배는 천재지변으로 쓰러진 것이다. 참 같은 거짓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고 전손 처리로 가닥이 잡혔다. 거짓 같은 참이다. (중략)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현실을, 회사를, 정부나 국가를, 종교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누운 배 한 척이 그렇게 됐듯 사실이라는 것은, 참이나 거짓이라는 것은 힘으로 쥐고 흔들 수 있었다. 세상은 성기고 흐릿한 실체였다. 그것을 움켜쥔 힘만이 억세고 선명했다. 힘은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스운 것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 힘이었다. 


119p

임원, 부장, 차장이 늘었으니 회사의 머리는 크고 많았다. 과장, 대리, 기사들이 줄었으니 회사의 손발은 오그라들었다. 크고 많은 머리와 오그라들고 개수가 부족한 손발. 그 꼴이 무엇일까? 괴물이었다. 나가는 사람들 중에 옥석을 가려 붙잡지 않고, 산적한 문제를 풀지 않은 채 자신들의 직위와 힘과 세력에 집착하는 임원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125p

나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일이 쌓여도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 잽싸게 해치워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분리하는 요령, 금방 해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일도 아닌 일을 일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그리고 적당히 틈만 보이면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여 넣는 요령. 요령을 익히니 일은 편해지고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130p

회사가 아주 아사리판이었다. 떠날 사람이 다 떠나고 나자 줄로 일어선 사람들은 서로 엮이고 꼬였고 그 속에서 뎅겅 잘려나가지 않으려 안달이었다. 직언하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같이 기고만장했고 그만큼 더 그것을 잃어버릴까 안절부절이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이런 게 조폭이지. 무슨 회사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정치라고 말했다. 우스운 소리였다. 이딴 게 무슨 정치란 말인가? 알력이고 쟁탈이었다. 하지만 나 따위가 그러든 말든 아무 상관 없었다. 


139p

"결국 줄이다. 남자는 마흔 중반, 쉰 그쯤에서 다 꺾인다. 슬슬 하초에 힘도 달리고 여자도 지겹고, 그러면 눈이 어디로 가는지 아냐? 권력에, 정치로 가는 거다. 조직, 자기 세력이 남자의 지렛대가 되는 거지. 그걸로 서로 넌지시 가늠하는 거다, 누가 더 큰지. 화장실에서 서로 남의 것을 훔쳐보듯이 말이다. 가랑이 사이 것이 쪼그라드니까 뭐라도 하나 길게, 큼직하게 늘어뜨리고 싶은 거지. 남자란 다 그렇기 마련이고 너도 나중에 그렇게 될 거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또 어쩔 거냐? 집에서는 식구들, 밖에서는 부서원들, 다 너만 바라보고 있다. 실적을 내야 계속 일을 할 거고 일을 하자면 잡고 흔들 힘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어느 지위 이상 올라서면 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이 되게 시키고, 시키는 대로 해오게 만들고 그걸 내 부서, 내 조직의 실적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해지는 거다. 원리 원칙이나 너 하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걸 두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잘해라, 알아서 기어라." 팀장은 피식 웃었다. "어련히 잘할 것 같기는 하다만."

그 말에는 내 속을 찌르는 것이 있었다. 


158p

황 사장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모두 알았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임원들이 웅얼거렸다. "알겠다고 말하지 말고 알았다고 말하십시오.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을 모두 말했고 그렇게 시켰는데, 뭘 알겠다는 겁니까? 모르는 것이 있는데 알았다고 말해두겠다는 뜻입니까, 모르든 알든 덮어놓고 아는 척하겠다는 뜻입니까?" 임원들은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누가 알았습니다, 하나? 다 알겠습니다 하지' 하는 얼굴들이었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분명하게 말씀하세요. 말이 흐릿하면 생각이 흐릿해지고 생각이 흐릿하면 판단이 흐릿해지는 겁니다. 알았습니까?"


173p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을 때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젊기 때문에, 자신이 젊다는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랬나? 그저 몰리고 몰려 도망쳐왔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286p

권 부사장은 황 사장처럼 사람들을 몰아붙이지 않았고 궁지로 내몰리지 않은 사람들은 문제 속의 문제, 문제의 뿌리까지 꺼내 보이지 않았다. 문제의 뿌리를 캐내지 못했으므로 대안과 대책은 합의에 그쳤고 합의였기 때문에 책임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어느 한 사람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고 책임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문제로 모습을 바꾸며 다시 예전처럼 묻히고 덮였으며 그 위로 다른 문제들이 또 쌓였다.


297p 

"내가 항상 우리 부서 교육 시간에 하던 말이 있습니다. 배운다는 걸 똑같이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따라 하는 건 배우는 방법이다. 따라 하려고 배우는 게 아니라 더 잘하려고, 가르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배우는 거다. 여러분 모두 아직 젊고 많은 일을 배워나갈 때니 이 말을 기억해줬으면 싶습니다. 우리가, 또 어떤 사람도 여러분보다 더 나은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먼저 태어났고 먼저 배웠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것이 선생, 먼저 난 사람이라는 말뜻입니다. 배우고 익히되 우리처럼 되지는 마십시오. 부디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301p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 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년,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남은 것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그것도 아주 잘해야 조 상무나 곽 상무 같은 사람이 될 터였다.  


306p

이상화 시인의 시구처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지만 그 봄은 빼앗긴 봄일 수밖에 없다. 빼앗긴 봄에는 빼앗길 씨앗을 뿌릴 수밖에 없고 그 씨앗으로 알곡을 거둔들 밥은 아닐 것이다. 사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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