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toZ

밤과 음악 사이 첫 경험 후기

새벽 2시에 강남역 밤과 음악 사이에서 든 생각을 쓰다

by 거짓말의 거짓말

얼마 전 강남역 인근에 있는 '밤과 음악 사이'란 곳에 갔었다. 국민학생 시절의 작문력으로 요약해 일기를 써보자면 대충 이렇다.


나는 오늘 강남에 있는 밤과 음악 사이란 데에 갔다. 음악이 시끄럽고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랑은 잘 안 맞는 장소 같았다. 참 재미없는 하루였다.


8살로부터 지금은 20년 이상이나 멀어져 버려서 표현력이 조금 늘었다. 지금부터 쓰려는 것은 30살 넘어 처음 가본 밤과 음악 사이 후기다. 하지만 그날 밤 전체의 후기는 아니다. 그곳에 입장료를 내고 팔찌를 찬 뒤 약 2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당시 시점'의 감상만을 현장감을 살려 쓴다. 3시간 후, 4시간 후의 감상과 2번째로 간 그곳의 감상은 바뀔 수도 있어서다. 옳고 그름과 같은 윤리적 잣대나 가치 판단 없이 그때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펄떡펄떡 뛰고 있는 생선. 밤과 음악 사이의 첫 느낌은 그랬다. 붉은빛이 도는 투명한 비늘로 몸을 감싸고 물 밖에 나와 펄떡펄떡거리고 있는 생선. ‘미스터 초밥왕’에서 본 붉은 참돔이 떠올랐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흔들고 있는 남자, 여자들의 욕망이 내게는 ‘붉은 참돔’으로 보였다. (과장을 좀 하자면 목 위로 얼굴 대신 붉은 참돔이 올라가 있는 사람 수백 명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들의 욕망은 대체로 비슷할 것이었다. 예쁜 여자와 눈을 맞추고 말을 걸어 술 한잔을 더 한다. 짝을 맞춰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승부수'를 던진다. 성공 여부에 따라 그날 밤 만리장성을 쌓을 수도 있다. 실패하면 후일 도모를 위해 여지(전화번호)를 남기고 같은 장소로 돌아가 앞서 했던 과정을 되풀이한다.

몸을 흔드는 '동류'의 무리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만화의 말풍선처럼 그들의 욕망이 하얀색 풍선이 돼 하나둘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 풍선 안에 욕망이 검은색 글자로 타이핑되며 나타났다. 내용은 너무 직접적이라 옮기자니 민망하다.


여자들의 말풍선은 추측과 유추가 필요했다.


대체로 "나는 오늘 기본적으로 춤을 추러 온 거야.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너네가 말 걸어도 별로 관심 없지만 네가 누구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술 한잔 정도는 더 해줄 수도 있어."이지 않을까라고 상상해 봤다.


물론 상상이기 때문에 맞는지 틀린지는 모른다. 단순히 그냥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거나 혹은 "하여간 사내놈들은 다 똑같다니까, 머저리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처음에는 밤과 음악 사이에 대해 나와는 잘 맞지 않는 장소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중에서 가장 꺼림칙했던 것은 '친근함'이었다.


빠르게 켜졌다가 꺼지는 조명으로 인해 순간순간 떠오르는 여자애들의 면면은 너무 친근했다. 내 대학 후배, 내 학교 친구, 일터에서 만나는 그런 보통의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밤과 음악 사이는 입장료를 내는 의식을 통해 현실과 한 차례 차단하고 시끄러운 음악과 어두운 조명으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욕망의 분출 월드'에서 마주한 낯익은 얼굴들은 불편했다. 그 얼굴들이 하는 생각과 상상의 민낯이 드러나는 게 껄끄러웠다.


나는 우리말 소설보다 외국 작가의 소설을 더 좋아한다. 외국 소설의 작품성이 뛰어나다거나 주제 의식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한국 소설은 대부분 읽다 보면 '너무 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30년을 한국인으로 살아오다 보니 다른 한국 사람이 쓴 소설을 읽어도 어쩐지 그 작가의 '의도'가 빤히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외국 문학의 경우 번역이라는 기술적인 작업을 거치면서 한 번 뒤틀려지고,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생기는 이질감 같은 것들이 더해지며 내게 추가적인 재미 요소를 준다. 나와 다름에서 오는 부분에 흥미를 느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나는 전 세계에 있는 3000여 개의 언어 중 한글, 즉 우리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잘 쓸 수 있지만 그 언어를 활용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제일 하지 못한다. 낯부끄럽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어째서인지 "오늘 넌 정말 예뻐"라거나 "나는 네가 좋아" 혹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마워요" 같은 말을 좀처럼 할 수 없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같은 의미를 담은 말이라도 영어나 일본어 혹은 또 다른 어떤 국가의 말로는 편하게 할 수 있다. 대체로 여행지에서 가게 되는 '욕망의 분출 월드' 같은 곳에서는 그런 말들을 적재적소에 할 수 있게 된다.


자체 분석 결과로 말하자면, 한국말의 경우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말에 담긴 의미에 대해 100%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외국어라는 뒤틀림을 한 번 거치면 말(소리)에 담긴 의미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받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낯부끄럽고 민망한 말도 죄의식 없이 할 수 있게 되고,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묘한 길티플레저도 느낀다.


정리하자면 밤과 음악 사이라는 공간이 싫었던 것은 껄끄러운 욕망을 드러내는 친근한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려웠고, 말을 걸기 위해 넘어야 할 춤이라는 매개도 어색했기 때문이다.


붉은 참돔과 함께 밤과 음악 사이에서 떠오른 또 하나의 이미지는 수도꼭지였다. 어린 시절 시골에 가면 볼 수 있었던 은색의 철 수도꼭지. 수도꼭지를 돌리면 지하에 있는 지하수가 콸콸하고 힘차게 나오곤 했다. 그곳에서 욕망은 수도꼭지처럼 콸콸하고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수도꼭지를 최대로 열어 두는 경우가 별로 없다. 지하를 흐르고 있는 지하수(욕망)는 차고 넘치지만 그것을 절대 외부로 디렉트로 내보내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쓰는 것도 한 번쯤 내 자신의 필터를 통해 거르고 욕망을 배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콸콸하고 쏟아지는 욕망의 배출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수도꼭지처럼 마음껏 분출하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잘할 수 없을 뿐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제 나도 나와 맞지 않는 어색한 곳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는 것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나와 맞지 않는 장소에 던져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든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연히 손쉽게 나 자신을 바꿀 수는 없었고, 그 안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어색한 채로 마이너스인 감정의 늪에 빠져만 갔다. 하지만 그날 나는 5분에서 10분 정도 만에 그 장소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나로서 있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맥주 한 잔을 받아 들고, 기댈 수 있는 벽이나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차분히 서서 혹은 앉아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데 몰입했다. 실제로 그럴리는 없었지만 내 주위에 얇은 공기의 보호막 같은 것을 쳐두고 외부의 시끄러운 세상과 나를 차단하는 상상을 했다. 굳이 옛날처럼 그 시끄러운 곳에 나를 억지로 밀어 넣기 위해 초조해하지 않았다. 조용히 나를 그 공간에서 독립시켜 친근한 얼굴들을 관찰하며 지금의 생각들을 나중에 글로 써야지 라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시계는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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