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을 자극하는 어떤 느낌
향수를 뿌리고 시간이 지나면 잔향이 남는 것처럼 어떤 글을 한 편 쓰고 나면 어떤 감각 같은 게 남는다. 나는 그 감각을 '잔감(殘感)'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비유로서 말하자면 잔감은 그 글을 완성하고 나서 한동안 내 손가락 끝에 남는다. 가공의 공기 덩어리가 내 손가락 끝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그런 느낌. 때로는 기분 좋게 손가락 끝을 간지럽히고, 때로는 끈적한 쥐덫을 만졌을 때처럼 불쾌하기도 한다.
아주 가끔이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글을 쓰고 나면 그 잔감은 꽤 오래간다. 길을 걷거나,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썼던 문장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기분 좋은 잔감이 남는 글을 쓰고 나면 그 글을 보게 될 사람의 반응은 크게 개의치 않게 된다.
스스로 '합격'이라는 나름의 선을 통과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얼마만큼은 재미있게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고, 설령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재미가 없더라도 나름대로 납득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많은 경우에 글을 쓰고 났을 때 꺼림칙한 잔감이 남는다. 기분 나쁜 잔감이 남을 때는 유독 그 글을 보게 될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어떤 때는 가까운 지인 몇 에게 그 글을 먼저 보여주고 감상을 묻기도 한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잔감이란 것은 그 글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 혹은 품과는 별개다. 순식간에 써 내려갔음에도 기분 좋은 잔감이 남을 때가 있는 반면 이틀 밤, 삼일 낮을 고민해 꾸역꾸역 문장을 이어 나갔음에도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다 중간에 나온 듯한 불쾌한 잔감이 남는 경우도 있다.
방금 전에 페이스북과 브런치를 통해 연재하던 소설 비스무리한 것의 10화를 썼다. 그런데 이건 불쾌한 잔감 수준이 아니라 어디 내놓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참담하다. 문장 하나하나는 나름 고심했는데 글 전체가 작위적이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와 닿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나서 10화는(클릭) 처음부터 다시 썼다.)
가끔 슈퍼스타 K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기술적으로 노래가 뛰어나지는 않은데 몰입이 되는 목소리가 있다. 흔히 얘기하는 '진심'이 담긴 노래들이 그렇다.
글도 비슷해서 처음에는 진심으로 쓰다가도 호흡이 길어지면 거기에 과욕과 허세가 추가돼서 작위적이 되고 감동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독서와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타이밍도 중요해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처음에 펜을 들어야지라고(엄밀히는 타자로 치지만) 생각했던 순간의 감각을 재현해 내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취미로, 재미로 글을 쓰는데도 이런 데 만약 글을 대가로 밥을 빌어먹게 되면 불쾌한 잔감에 맞서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활자화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는데, 요즘은 속도도 점점 더뎌지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건지, 조심스러워지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책을 읽지 않아서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