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toZ

오이, 그리고 사랑

by 거짓말의 거짓말
밖은 비. 나는 부엌에서 혼자 오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이는 거의 늘 냉장고에 들어 있으니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 오이가 늘 냉장고에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원할 때 수중에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비, 오이, 녹차> 중 by 에쿠니 가오리



지인 중 몇이 그랬다. 결혼이란 건 결혼할 나이가 됐을 때 옆에 있는 누군가가 싫지 않다면 하는 거라고. 틀리지 않은 말 같다. 소울메이트, 운명, 영원 같은 달콤한 말들이 넘쳐나지만 현실은 그렇게 입속에서 녹아버리는 사탕처럼 달달하진 않다. 만만하지 않다.


어떻게 만나서 적당히 사귀다 그럭저럭 결혼하고 사는 대로 살아간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동네를 따지고, 키를 따지고, 통장의 잔액을 따지고, 브래지어의 사이즈를 따지고, 뭐 여러 가지 것들을 셈한다. 현실이 그렇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하등의 이유도 없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어른스럽고 바람직한 현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담쟁이'란 시로 유명한 시인 도종환이 몇 년 전 학교에 와 강연을 할 때 그랬다.


"누구나 특별한 사랑을 꿈꾼다. 특별한 사람을 만나 특별한 사랑을 하기를. 하지만 누구를 만나든 특별하게 사랑하면 그것이 특별한 사랑이다."라고.

훌륭한 포장이다. 이런 포장마저 없으면 삶은 더 팍팍해질 것이다. 위로가 되는 말이다.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그의 소설에서 이렇게 적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점점 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누군가를 싫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라고.

이런 문장은 개인적으로 '좋다'라기보다는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실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환상을 깬다.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슈이치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고백이란 편한 거라고 닛타는 생각한다. 들고 있는 패를 보여주고 나머지는 모두 상대방에게 맡긴다. 고백은 비겁하다, 고도 닛타는 생각한다. 패배를 인정하고 그 뒤는 상대방의 정에 매달린다. 고백은 버릇이 된다. 드러내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낙관한다. 그러나 세상이란 그렇게 어수룩한 놈들만 있는 곳이 아니다. 손 안의 패는 이용당하고, 패배자로 취급되고, 끝나기는커녕 등을 떼밀려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너무 비관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닛타는 피부로 느낀다. 아무리 비싸도 비관론을 사라. 속으면 안 된다. 원래 낙관론이란 공짜인 것이다, 라고.

<돌풍> by 요시다 슈이치



어떤 비관주의자들은 사실은 누구보다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기대를 잔뜩 하고 나서 선물 상자를 열었다가 안에든 물건을 보고 실망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선물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등의 말을 떠들어 대면서 자신을 지킬 보호막을 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별한 선물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받는 게 동시에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그렇고 그런 평범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척할 수 있을 만큼의 연기력도, 혹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만족하는 융통성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게 징징대는 어린애처럼 혼자 투덜거리는 것이다.


+

이런 것을 쓰게 되면 읽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쓰는 사람도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자신이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떠들어대고 나이보다 조숙한 척 하지만 들여다보면 정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두려워하고 있는 젖내 나는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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