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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Aug 14. 2017

기사단장 죽이기1 by 무라카미 하루키

15p

인상은 그날그날 바뀐다. 종종 사진을 찍을 때 실제 크기를 가늠할 셈으로 피사체 옆에 담뱃갑 따위를 놔두곤 하는데, 내 기억의 영상에 놓인 담뱃갑은 기분에 따라 멋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 같다. 아마도 사물이나 현상이 쉼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에 대항하듯이, 내 기억 속에서는 고정불변이어야 할 잣대마저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양이다. 


18p

나는 기회를 잡아 그녀들에게 접근해 유혹했고(보통의 상황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고, 원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 그녀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중략) 그녀들과 육체관계를 갖는 것은,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에게 시간을 묻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7p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떤 인간이든 저 안쪽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잘 찾아내어, 혹시 표면이 뿌옇다면(뿌연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헝겊으로 말끔히 닦아준다. 


33p

"물론 꿈은 일종의 방아쇠일 뿐이야." 그녀가 내 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말했다. "그 꿈으로 여러 가지 것이 다시 한번 확실해진 거지."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가."

"무슨 소리야?"

"총에서 방아쇠는 매우 중요한 요소니까, 방아쇠일 뿐이란 말은 적절한 표현 같지 않은데." 

그녀가 잠자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61p

거울에 비친 나는 그저 물리적인 반사일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 비친 내 얼굴은 어디선가 둘로 갈라져 떨어져나간 내 가상의 분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였다. 물리적인 반사조차 아니었다. 


75p

변명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올바른지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나는 나무토막을 붙들고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갈 뿐이었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고 하늘에는 별도 달도 없었다. 죽어라 나무토막을 붙들고 있는 한 익사는 면할 수 있지만, 내가 어디쯤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212p

내 뱃속 깊은 곳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짐승이 드디어 적당한 계절이 왔음을 알아차리고 눈뜰 준비를 하는듯한 감각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217p

"이를테면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그 이름 없는 우편배달부처럼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상상도 못했겠지요. 백몇십 년 후에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미술관까지 찾아가서, 혹은 화집을 펼쳐서 거기 그려진 자기 모습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리라고는요." 

"거의 틀림없이, 상상도 못했겠지요." 


229p

그는 남에게-아직 그다지 친밀하다고 할 수 없는 상대에게-그런 질문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로 보나 '당신 사생활에 고개를 들이밀지 않을 테니, 대신 내 사생활에도 고개를 들이밀지 말아달라'는 타입이다. 


238p

그는 지난 일을 뒤늦게 후회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자신은 가정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멘시키는 잘 알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일지라도 타인과 일상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는 매일 고독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그 집중력이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면 언젠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지 모른다. 그 상대가 부모이건, 아내이건. 그는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290p

꿈도 몇 가지 꾼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꿈이었는지는 깨면서 잊어버렸다. 그런 유의 꿈이 있다. 연결되지 않는 몇몇 조각이 교차하듯 나타나는 꿈. 조각 하나하나에는 나름대로 질량이 있지만 한데 얽히면서 서로를 지워버린다. 


300p

"당신이 지금 여기 있으면 좋겠어. 그리고 뒤에서 넣어주면 좋겠어. 전희 같은 건 필요 없어. 충분히 젖어 있으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대담하게 마구 휘저어주면 좋겠어."

"재미있겠는데. 하지만 대담하게 마구 휘젓기엔 미니 실내는 좀 좁을지도 몰라." 

"그런 것까지 따질 순 없지." 그녀가 말했다.

"연구해볼게."

"그리고 왼손으로 가슴을 주무르면서 오른손으로 클리토리스를 만져주면 좋겠어."

"오른발로는 뭘 하면 좋을까? 카스테레오 버튼쯤은 누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음악은 토니 베넷이면 괜찮겠어?"

"농담 아니야. 나 정말 진지해."

"알았어. 미안해. 진지하게 하자." 나는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어떤 옷을 입었지?"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고 싶은 거야?" 그녀가 유혹하듯이 말했다. 

"알고 싶어, 그에 따라서 이쪽 순서도 바뀌니까."

그녀는 입고 있는 옷을 매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성숙한 여성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옷을 몸에 걸치는가 하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그녀는 혀끝에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벗어나갔다. 

"어때 충분히 딱딱해졌어?" 그녀가 물었다. 

"쇠망치처럼." 내가 말했다. 

"못도 밖을 수 있어?"

"물론이야." 

세상에는 못을 박아야 하는 망치가 있고 망치에 박혀야 하는 못이 있다.  


328p

그녀는 그저 눈앞을 스쳐가는 그림자가 아니다. 입체적인 육체를 지닌 현실의 존재다. 혹은 입체적인 육체를 지닌 스쳐가는 그림자거나. 어느쪽인지는 나도 판단할 수 없다. 


375p

아마다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랬다. 사람들은 갖가지 고민거리를 들고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내용을 자기 속에만 담아두었다. 빗물이 물받이를 타고 용수통에 고이는 것처럼, 거기서 다른 데로 나가지는 않는다. 통 밖으로 흘러넘치는 일도 없다. 아마 필요에 따라 적절한 수량을 조절하는 것이리라. 


384p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침묵이 들릴 뿐이다. 침묵이 들린다-말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다. 고립된 산속에서는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444p

"보르도입니다." 멘시키가 말했다. "설명은 생략하죠. 그냥 보르도입니다."

"하지만 일단 설명을 시작하면 상당히 길어질 것 같은 와인이군요."

멘시키가 미소지었다. 눈가에 보기 좋은 주름이 잡혔다. "말씀대로입니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상당히 길어질 겁니다. 하지만 전 와인의 라벨을 분석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상이 뭐건 마찬가지에요. 그저 맛있는 와인-그 말만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484p

우리는 어찌 보면 닮은꼴인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다. 


497p

마지막으로 아이들 중 한 명을 모델로 세우고 그 모습을 칠판에 흰 분필로 그려낸다. 시범을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은 "우와" "빠르다" "똑같네" 하며 감탄한다. 아이들에게서 순수한 감탄을 자아내는 일도 교사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다. 


504p

"암, 그렇고말고. 퍼스트 오퍼는 일단 거절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기본 철칙이거든. 기억해둔다고 손해볼 건 없네."


509p

솔직히 말해 대답을 하기까지 이틀이나 필요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중략) 굳이 이틀의 유예를 받아낸 것은 상대방의 페이스에 고스란히 말려들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쯤에서 잠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심호흡 하는 편이 좋다고 본능이-그리고 또한 기사단장-내게 알려주었다. 


522p

"그렇습니다. 저는 일단 무슨 비밀이 생기면 금고에 넣고, 자물쇠를 걸고 그 열쇠를 삼켜버리는 인간입니다. 남에게 뭔가를 의논하거나 털어놓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526p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얼마든지 붙고 떨어질 수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마음이 가는 길은 관습이나 상식이나 법률로는 규제할 수 없다. 지극히 유동적이다. 그것은 자유로이 날갯짓하며 이동한다. 철새에게 국경의 개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략)

분노는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무엇을 상대로 화를 낸단 말인가? 내가 느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비의 감각이었다. 누군가를 강하게 원하는데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생기는 격렬한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마음이 자동으로 작동시킨 마비의 감각이다. 다시 말해 정신의 모르핀 같은 것이다. 


557p

그녀는 고백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말이지. 옛날부터 핸섬한 사람한테 무척 약했어.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으면 이성 같은 게 마비돼버려. 문제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항할 수가 없어. 아무리 해도 안 고쳐져. 그게 나의 가장 큰 약점인지도 몰라."

"고질병." 내가 말했다. 

그녀가 수긍했다. "그래, 그런 걸 거야. 치료할 수도 없는 이상한 질환. 고질병."

"어쨌든 내게는 그다지 순풍이라고 할 수 없는 정보네." 내가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잘생긴 얼굴은 나라는 인간의 유력한 세일즈 포인트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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