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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Aug 15. 2017

기사단장 죽이기2 by 무라카미 하루키  

12p

나는 미대 시절,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전혀 늘지 않는 동기를 수도 없이 봤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사람은 처음부터 타고난 것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내면 이야기를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야. 어떤 재능이나 자질은 연습하지 않으면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거든."


82p

나이가 몇이든 모든 여자에게 모든 나이는 미묘한 나이다. 마흔한 살이든 열세 살이든 그녀들은 언제나 미묘한 나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여성에 대해 소소한 경험을 통해 내가 얻은 교훈 중 하나였다. 

"그래도 남녀 사이는 왠지 신기하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신기하다니, 어떻게?"

"우리만 해도 이렇게 만나고 있잖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서로 알몸으로 끌어안고 있어.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부끄러움도 없이. 그런 거, 생각해보면 신기하지 않아?"


136p

지극히 공정하게 말해, 멘시키는 매력적인 중년남자다. 핸섬하고 부자인데다 독신이다. 옷차림도 훌륭하고 언동이 부드러우며 산머리의 커다란 저택에 살면서 네 대의 영국차를 몬다. 틀림없이 세상의 많은 여자가 그에게 흥미를 품을 것이다(세상의 많은 여자가 나에게 특별히 흥미를 품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154p

"서른여섯 살이라고 하셨던가요?" 멘시키가 불쑥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나이일 겁니다."

(중략)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전설이 되는 것은 거의 메리트가 없어요. 아니, 제 생각엔 오히려 그건 일종의 악몽에 가깝습니다. 일단 전설이 되어버리면 그 뒤로는 스스로의 전설을 덧쓰며 긴 여생을 보내야 하는데, 그것만큼 따분한 인생도 없으니까요." 


231p

"하지만 일단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남녀의 관계를 멈추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정말로 간단하지 않다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것은 힌두교 교의에서 말하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온갖 것을 숙명적으로 짓밟으며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뒤로 물러나는 일은 없다. 


298p

"당신한테는 원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원할 만큼의 힘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에서,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밖에 원하지 못했습니다." 


303p

"그게 말이지, 여자 얼굴은 좌우가 다르거든. 그거 알았어?"

"사람의 얼굴은 완벽한 좌우대칭이 될 수 없어." 내가 말했다. 

"가슴이나 고환도 좌우 크기와 모양이 다르잖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인간의 모습은 좌우비대칭이고, 그래서 재미있는 거지."

(중략) 

"아무튼 그 사실을 알고 조금 무서워졌어. 그때 그만두면 좋았을 것을 왼쪽과 오른쪽만으로 각기 하나씩 얼굴을 합성해봤어. 얼굴을 절반으로 나눈 뒤에 한쪽을 반전해서 붙이는 식으로. 오른쪽만으로 얼굴 하나를 만들고, 왼쪽만으로 또 얼굴 하나를 만드는 거야. 컴퓨터 프로그램을 쓰면 간단하니까. 그랬더니 완전히 다른 인격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두 명의 여자가 만들어진 거야. 놀랐어. 요컨대 한 사람안에 실은 두 명이 도사리고 있었던 거라고.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중략)

"그리고 한번 깨닫고 나니까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도무지 알 수 없게 됐어. 이를테면 섹스를 하다가도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게 오른쪽의 그녀인지 왼쪽의 그녀인지 모르겠거든. 만일 오른쪽 여자와 섹스하는 거라면 왼쪽 여자는 어디서 뭘 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만일 이게 왼쪽 여자라면 오른쪽 여자는 어디서 뭘 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정말이지 복잡해져. 뭔지 알겠어?"


305p

"나는 평범한 인간입니다,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스콧 피츠제럴드가 무슨 소설에 썼지." 


541p

"걱정할 것 없네. 시간이 전부 해결해줄 테니. 형태를 지닌 것들에게 시간이란 위대한 존재지. 시간은 한없이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동안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거든. 그러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577p

마리에가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자랄지 나는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이 나잇대의 여자아이는 외모도 마음도 순식간에 바뀌어버린다. 몇 년 지난 뒤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열세 살 마리에의 초상을 하나의 형태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을(설령 미완성에 그쳤다 해도) 기쁘게 생각했다. 이 현실세계에 불변의 형태로 영속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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