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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Sep 20. 2017

Intro "형, 같이 스윙댄스 배워볼래요?"

32살, 스윙댄스와 첫 조우

*경험에 일정 부분 허구를 더한 '반 픽션(half fiction)'입니다.


"형, 같이 스윙댄스 배워볼래요?"     


2016년 2월의 어느 날,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P가 물었다. P는 한 경제 TV의 PD였다. (지금은 경제 TV를 관두고 대기업 계열 홈쇼핑 회사에서 PD로 일하고 있다.)      


P는 "친한 친구 중에 의욕 제로에 자신감도 별로 없던 그저 그런 녀석이 하나 있었다"며 "녀석이 스윙댄스 동호회를 하고 나서는 표정도 밝아지고 활력도 찾았다"고 했다. 플러스 P는 "스윙 동호회가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여자를 만나기 좋은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단박에 '흐음, 그럴듯한데'와 '밑져야 본전이지'를 거쳐 '어차피 여기서 더 잃은 것도 없는 걸 뭐'의 마음가짐으로 그러마고 답했다. 듣고 보니 지금 내게 여자 친구가 없는 것은 환경이 좋지 않기 때문인 듯도 싶었다. 과거 2년 동안 여자 친구가 없었다면 현상유지할 경우 향후 2년 동안도 여자 친구가 없을 확률이 높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둘 중 하나다. 환경을 바꾸거나, 나를 바꾸거나. 후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우니 나는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유년시절 국민체조와 청소년 체조를 따라 하기도 벅찰 만큼 몸치였던 데다 노래방에서는 정박으로 탬버린도 제대로 못 치는 나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그때의 내게 P가 스윙댄스가 아닌 바둑이나 야구, 심지어 꽃꽂이나 우쿨렐레 동호회를 같이 하자고 했어도 나는 그러마고 답했을 거다. 당시의 나는 내 인생의 라이프 곡선을 그려보라고 하면 철이 든 이후(사실 지금도 철이 안 들었지만 편의상 주민등록증으로 술과 담배를 살 수 있게 된 이후라고 하자) 가장 최악인 시기를 지나 이제 막 반등을 하려고 발악하는 단계였다.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나와는 선을 긋고 무언가 다른 나로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내가 더 나은 내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심지어 이전까지 보다 더 나쁜 내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당시에 만으로 30년 가까이 살아온 '나'에게 지나 칠정도로 신물이 나 있었다.      


만약 신이 '지금의 나보다 행복한 삶'이 적힌 공 2개, '지금의 나와 비슷한 정도로 불행한 삶' 공 3개,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삶' 공 5개를 상자에 넣고 랜덤으로 뽑아 걸리는 삶으로 바꿔준다고 해도 난 주저 없이 박스에 손을 넣었을 거였다. 어차피 지금보다 더 최악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반에, 어디 한번 될 대로 돼봐라 하는 자포자기의 마음 반이었다. 지금의 나만 아니면 어쨌든 괜찮다는 심정이었다.      


그럼 그땐 나는 왜 그렇게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3요소인 돈(가령 직장), 관계(가족이나 애인), 건강(나와 가족)이 모두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한 경제신문의 기자다. 2013년에 입사했으니 2016년 당시에는 횟수로 4년차였다.      


그때 돈이 문제였던 것은 일반적으로 박봉인 기자라는 직업 탓은 아니었다. 입사 후 그때까지 나는 월급을 거의 손대지 않은 편이었다. 특별히 아껴야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기보다는 ‘소비’ 자체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었다.  
     

삶에 의욕이 없고 우울한 무기력 상태가 지속될 경우 소비를 통해 출구를 찾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반대였다. 한 달 내내 교통비와 약간의 식비를 제외하고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월급은 차곡차곡 쌓였다. 당시 나는 일종의 ‘반 좀비’와 같은 상태였다. 30년 넘게 내 뇌의 95% 이상을 차지했던 '여자'에 대한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생명의 동력인 리비도(성충동) 마저도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대한 욕망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가 사회의 구성원이길 포기했거나, 무언가 내부적으로 크게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돈이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내가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익 추구를 지상목표로 하는 회사(언론사)의 일원인 이상 밥값을 하지 않고 있다는 자각은 내 정신과 몸에 생각 이상으로 큰 스트레스를 줬다. 일이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렵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무엇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정신이 피폐해졌다. 몸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전부터 피부가 민감한 편이었지만 이유 없이 피부에 상처가 나고 한번 생긴 상처는 몇 달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딱히 병증의 원인이 있지도 않은데 정신이 병들자 육체가 신호를 보냈다. 아무리 많이 자도 매번 하품이 나왔고 의식은 흐리멍덩했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주말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월요일 아침에 대충 씼고 출근했다. 매일 점심에 취재원이라 불리는 사람을 만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지만 돌아서면 상대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에서 멍한 채로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서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다. 시간은 화생방 가스실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리게 갔다. 반면 때로는 눈을 감았다 뜨니 '3개월 후' 자막이 나오는 영화처럼 빠르게도 갔다.      


의욕이 없으니 일에서도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6개월 간 수습기자 시절에도 한 번도 지적받지 않았던 오타가 기사에서 자주 나왔다. 보도자료를 처리하는데도 오타가 넘쳐났다.      


보도자료란 쉽게 말해 기자가 출입을 하는 정부기관이나 기업이 홍보나 알림을 목적으로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자료를 말한다. 여러 신문에 동시에 실리는 기사는 대부분 보도자료다. 기자의 일은 기사처럼 정리된 보도자료를 매끄럽게 다듬고 일반 독자 누구나(중학생 정도)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는 것 정도다. 수습기자 시절 10분이면 처리할 보도자료를 처리하는 시간이 30분으로 늘었지만 오타는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일 자체에 의욕이 없어져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나도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입사 초기엔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회사 분위기에 놀랐다. 기자란 직업이 갖는 무게감에 고통의 역치를 한껏 끌어올려놨었는데(힘들 걸 각오했다는 뜻) 막상 직장에 들어오고 보니 군대생활보다 더 수월한 수준이었다. 특별히 나를 괴롭히는 상사나 선배도 없었다.       


하지만 종합일간지에서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를 상상했던 내게 경제지 특유의 분위기는 조금 이질적인 느낌을 줬다. 언론사는 일반적으로 '권력은 비판해도 기업은 쉽게 비판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경제지는 둘 모두의 비판에 더 소극적이다. 특히 기업의 경우에는 비판 기사를 써도 기사의 내용이 바뀌거나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기자가 자신의 얼굴을 박고 쓰는 기자 수첩의 내용이 바뀌었을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됐다. 기자 스스로가 자기 검열을 하는 순간 쓸 수 있는 기사는 급격히 줄어들고 쓸거리가 줄어든 기자는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직장 생활에서의 불만족은 삶의 전반적인 만족도와 의욕, 자신감을 떨어뜨렸다. 실제로 우울한 상태가 지속되자 생각하고 사고하는 인지능력 자체가 떨어졌다. 전에는 분명 회사의 신문을 보면 이런 것도 기사인가라는 생각을 종종했는데 이 당시에는 어떤 기사를 읽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전에는 비웃던 수준의 기사를 봐도 나는 그것조차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겁이 났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말과 단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감각이었다. 전에는 길을 걷거나 지하철에서 자주 머릿속으로 단어를 굴려가며 쓸 거리를 생각하곤 했는데 사고가 멈춘듯 했다. 말이 빠른 편이라 전에는 생각과 동시에 입과 혀로 단어를 나름 논리 정연하게 쏟아냈는데 침체기의 막바지에는 말더듬이 증상까지 나타났다. 때로 원하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자신감의 저하로 정상일 때도 힘들었던 연애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 앞서도 말했듯 정신의 이상은 몸의 이상을 초래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당시의 나는 경미한 정도의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지인에게 소개를 받은 정신병원의 문 앞까지 가기도 했다. 우산 없이 한동안 차가운 비를 맞으며 서 있다가 병원에 들어가는 대신 집으로 발검음을 돌렸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걸 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내부의 무언가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다.      


계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2~3년을 혼자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가능성이 0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바닥인 상태에서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게 되니 이상하게 생에 대한 반작용이 솟구쳤다.     


나이 서른이 넘어 무기력하게 좀비처럼 연명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 스스로 일어나 여기서 나아가는 방법만이 그 여자애에게 복수하는 방법이 될 것 같았다. 물론 그 여자애는 이쪽을 신경도 쓰지 않을테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때부터였다.      


회사에서 주어지는 일에 집중하며 나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마음을 바꾸고 일을 하기 시작한 뒤로 회사에서 주는 반기별 인센티브에서 1등을 해 한 달치 월급 이상을 보너스로 받았다. 스윙 댄스 동호회를 시작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만나다 보니 일적으로 만나는 사람을 볼 때도 여유롭고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표정이 바뀌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됐다.     


이 모든 시작은 P의 한 마디였다.      


"형, 같이 스윙댄스 배워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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