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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Feb 18. 2020

1st step -떨리는 건 살구향 때문이야

살구향이 났다. 아주 잠깐 내 손 위에 얹은 그 아이의 손에서. 비염 때문에 냄새를 잘 맡지 못하지만 그건 살구향이 분명했다. 왼손을 코로 가져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를 그 아이의 잔향을 확인해 볼까. 하지만 혹시나 이상한 오해를 살까 봐 관뒀다. 


'락, 스텝, 스텝, 앤, 스텝, 앤'이라는 6박자를 밟는 동안 내 심장은 6박자보다 분명 더 빨리 뛰었다. 6박자가 끝나고 파트너를 바꾸며 인사를 할 때 분명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그 아이의 입술에서 옅은 미소를 본 것도 같았다. 닉네임을 적은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있었는데 잘 보지 못해 아쉬웠다. 참 다행으로 한 동작을 연습하고 매번 파트너를 바꿨기 때문에 한 바퀴가 다 돌면 그 아이와 다시 한번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곁눈이 자꾸 그쪽을 향했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과도 한 동작을 끝낸 뒤 눈을 맞추며 웃어 보였다. 당연하다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게 좀 싫었다. 


첫 수업을 들은 곳은 홍대역에서 도보 10분 정도 걸리는 건물 지하에 있는 댄스홀이었다. 모르고 지나치면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게 분명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갈수록 신나는 스윙 음악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을 여는 순간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서 문자 그대로 밝은 에너지가 빛처럼 번져 나왔다. 대학시절 별 볼일 없던 친구가 연극 무대 위에 서자 갑자기 빛나 보였던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박수를 받는 그 친구는 전에 내가 알던 그 친구가 아니었다. 무대 위의 사람도, 춤을 추는 사람도 모두 빛이 났다.  


여기서는 편의상 남자를 리더, 여자를 팔러라고 불렀다. 스윙은 기본적으로 커플 댄스이고 역할에 따라 춤을 이끄는 사람을 리더, 이에 맞춰주는 사람을 팔러라고 불렀다. 엄밀히 말해 성별이 아닌 역할로 구분하는 것이었지만 초보자들은 남자가 리더, 여자가 팔러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6박자 스텝은 왼발을 뒤로 밟고, 다시 오른발과 왼발을 교대로 밟는 단순한 스텝이었다. '앤'에서는 발을 바꾸지 않고 무릎을 굽혀 리듬을 타면 됐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사람들도 서 너번 연습을 한 뒤에는 다들 곧잘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경우엔 좀처럼 기본 스텝이 잘 외워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부터 그랬다. 청소년 체조를 외우거나, 체육대회 때 반 전체가 하는 응원 안무를 배워도 나는 좀 느렸다. 구구단을 외거나 시를 외우는 것과 달리 몸을 쓰는 일은 어쩐지 잘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서로 마주 보고 손을 맞잡는 '오픈 포지션'을 배우고, 팔러가 리더에게 측면으로 안기는 '클로즈드 포지션'도 배웠다. 처음 오픈 포지션을 할 때는 내민 왼손에 팔러의 손이 얹혀지는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클로즈드 포지션을 배울 때는 오른손을 팔러 허리 뒤편 어디에, 어떻게 둬야 할지를 두고 내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스텝을 외우는데 집중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잡고 있는 게 팔러의 손인지 빗자루 인지도 알 수 없게 돼버렸다. 강사님들 역시 "상대를 의식해서 어설프게 배려하면 더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라고 해서 용기가 좀 생겼다.  


첫날부터 지진아로 보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한창 수업에 집중을 하다가도 그 아이와의 순서가 다가오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앞서서 이미 20명이 넘는 다른 팔러와 동작을 연습하면서 이제는 처음의 어색함도 거의 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 아이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다시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손은 손이고 빗자루는 빗자루고 팔러는 팔러다'라고 주문을 외웠지만 내 심장만 6박자 비트를 쪼개서 12박자로 뛰고 있었다. 서른이 되도록  몰랐지만 어쩌면 나는 살구향에 긴장하는 타입 인지도 몰랐다. 떨리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살구향 때문이야, 라고 암시를 걸었다.      


오늘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나면 그 아이와 개인적으로도 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뒤풀이나 술자리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클로즈드 포지션을 한 체로, 잔뜩 긴장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들을 했다. ‘언더 암턴’이라는 새로 배운 고난도 기술(?)을 멋지게 성공시키고 그 아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역시나 웃는 모습이 예뻤다. 파트너가 바뀌기 전 짧은 틈을 타 나는 살구향이 나는 그 아이에게 첫마디를 건넸다. 


“스윙댄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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