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전 회사 동료 추천으로요. 하루님은 어떻게 오셨어요?"
처음 배운 고난도 기술(?)인 '언더 암턴'의 호흡이 좋았던 탓일까. 내 질문에 그 아이도 바로 내게 같은 질문으로 되물어 왔다. 게다가 그 아이는 내 닉네임을 이미 본 것이다. 나쁘지 않은 흐름이다. 다만 김칫국은 금물. 향기로운 살구향을 김칫국 냄새로 망치는 일만은 피해야지.
"전 친구 따라왔어요. 앞으로 자주 봐요 '오늘'님"
머릿속으로는 과하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일 작정이었는데 내 멍청한 얼굴 근육들이 나를 도와줬을 리 만무했다. 문득 최근에 본 일본 소설이 생각났다. 선배의 여자 친구를 보고 주인공이 생전 처음 겪는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을 자기 방식으로 서술하는 내용이었다.
그 사람 앞에서 까닭 없이 가슴이 설레고 빨리 감기를 할 때의 비디오 화면처럼 안정감이 없어지고,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오버해서 받아들여, '산책이나 할까?'라는 상대의 말에 부랴부랴 집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 저 이제 결혼하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긴장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침착하자. 나는 소설의 그 녀석처럼 이제 갓 스물도 아니고, 산책을 제안받기는커녕 아직 상대의 이름도 모른다. 무엇보다 첫눈에 반하는 일 따위야 15살 이후로 매년 연례행사처럼 겪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미 상대랑 손도 몇 번 잡았고, 나란히 섰을 때 상대의 허리 높이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내 능력이 아니라 스윙 신의 가호를 잠깐 빌린 것뿐이니까, 침착하자. 나는 아직 그녀에게 반한게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아이의 살구향에 잠깐 정신이 혼미해진 것뿐이다. 그런데 아버지 번호가 뭐였더라.
살구향 손과 빗자루를 각각 서너 번씩 지나치니 첫 수업이 끝났다. 강사님은 수업 이후에 '제너럴(소셜)' 시간이 있다고 공지했다. 제너럴은 그날 배운 동작들을 실전에 응용하는 일종의 자유 댄스 시간이었다. 스윙을 배우는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모두가 한 공간에 모여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음악이 나오면 리더나 팔러가 아무에게나 춤을 신청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리더가 먼저 팔러에게 손을 내민다. 여기서는 춤을 신청하는 것을 '홀딩 신청'이라고 불렀다.
기본적으로 리더는 제너럴 시간에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이상 팔러의 춤 신청을 거절할 수 없다. 팔러는 휴식을 하는 등의 이유로 리더의 홀딩 신청을 거절하면 그 곡이 끝나기 전까지는 다른 리더의 홀딩 신청도 거절해야 한다. 리더를 거절한 팔러는 그 곡이 끝난 뒤 홀딩 신청을 거절한 리더와 우선 춤을 추는 것이 좋다. 이처럼 제너럴에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홀딩 신청을 하는 쪽도, 거절하는 쪽도, 거절당하는 쪽에게도 합당한 명분을 주는 것이다. 이쪽(스윙댄스 판)의 시스템이란 것도 상당히 정교하다고 생각했다.
홀딩 신청이 호락호락 할리 없는 스윙 초보들을 위한 시스템도 훌륭했다. 먼저 첫 수업을 들었던 신입생 10여 명씩을 묶어 작은 조를 하나 만들고 선배 기수가 조장 역할을 맡았다. 리더와 팔러의 비율도 대충 맞았다. 각 조의 조장은 제너럴에 대한 설명과 각 조에 속한 조원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댄스홀 한쪽 벽면에 접이식 테이블을 여러 개 설치해 조별로 앉았다. 맥주 피트와 간단한 안주가 제공됐다. 선배들의 춤을 보면서 같은 조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구조였다. 그 아이와 같은 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플라스틱 컵에 따른 맥주를 홀짝이면서 선배들이 추는 춤을 구경했다. 지금으로서는 오늘 내가 배운 춤과 저 춤이 같은 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직 아이스브레이킹이 완전히 되지 않아서 조원들끼리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조장이 총대를 메고 조원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지만 단답이 나오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내가 속한 조는 조원들이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살구향 그녀 쪽의 테이블은 분위기가 좋은지 가끔 빵빵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조원들 모두 슬쩍 눈동자를 돌려 그쪽 테이블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남자의 종특인지 아니면 그냥 내 성격 탓인지는 모르지만 단체 모임에서 내가 있는 테이블이 '노잼'이면 일말의 책임감과 죄책감 같은 게 생긴다. 20대 때는 단체미팅 같은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자처하고 광대가 됐지만 30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그런 일에도 좀 신물이 났다. 마냥 웃기기만 한 놈과 재미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냥 웃기기만 한 놈이 될 바엔 차라리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오늘 같이 처지는 분위기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오랜만에 광대 스위치를 'ON'으로 바꿨다. 나는 조장을 서포트해서 적당히 질문을 배분하며 조원들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간단하게 조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얼음을 깨뜨렸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한 팔러가 "다음 곡에 같이 추실래요?"라고 물어왔다. 어라, 난 오늘은 별로 춤을 출 생각이 없었는데.
설마 했지만 역시나 나의 첫 춤은 절반이 '죄송해요'였다. 기본 스텝을 밟는 것뿐인데 머리가 하얘지면서 음악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박자를 잃어버리고 헤매다 팔러와 같이 멀뚱히 서서 다시 스텝에 들어가기 위해 애꿎은 카운트만 반복해서 셌다. 하지만 한 번 잃어버린 박자의 미로에서 공허하게 카운트만 반복할 뿐, 언제 다시 스텝에 들어가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30분 같았던 3분이 끝나고 상처투성이가 돼서 자리로 돌아왔다. 남이 쓰다 버린 빗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한동안 홀딩 신청은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확실히 스윙댄스를 처음 시작하는 리더에게 홀딩 신청은 넘기 힘든 산 같았다. 조장과 강사님들이 번갈아가며 원래 처음에는 못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을 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의기소침해 있는 나와 달리 살구향 그녀는 동기들과 선배 리더들의 끊임없는 홀딩 신청을 받고 있었다. 대충 봐도 10곡이 나오는 동안 1곡을 춘 나와 달리 적어도 8~9곡 이상은 춤을 추고 있었다. 기본 스텝 밖에 못하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춤을 추는 동안 내내 방실방실 웃고 있는 모습에 속이 쓰렸다. 선배 리더들은 확실히 춤을 추면서도 여유가 넘쳤고, 수업에서 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동작들을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아버지, 역시나 난 안되나 봐요.'
스위치를 내린 것도 아닌데 광대 스위치가 자동으로 'OFF'로 내려갔다. 한참 의기소침해 있는데 선배로 보이는 한 팔러가 다가왔다.
"같이 추실래요?"
*본문에 인용된 일본 소설은 <퍼레이드 BY 요시다슈이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