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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Feb 27. 2020

3rd step-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미안해요.

feat. 장수원

어라, 그 많은 팔러 중에 하필이면 이 팔러라니. 의기소침한 채로 선배들의 춤을 쳐다볼 때 유독 눈에 띄던 팔러 중 한 명이었다. 살짝 굽이 높은 구두, 붉은 바탕에 검은 도트무늬 치마를 입은 그 팔러는 리더의 사인에 맞춰 경쾌한 스텝으로 댄스홀을 누볐다. 음악 간주 부분에서는 틀에 박힌 동작이 아닌 음악에 맞춰 리더와 즉흥 동작(후에 그것을 '뮤직컬리티'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을 하며 여유롭게 웃음을 주고받았다. 리더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거울에 비춘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특히 팔러가 스핀을 돌 때에는 아래가 넓은 치마가 풍성하게 펴지며 마르지도 부하지도 않게 균형 잡힌 팔러의 상체 라인과 멋진 조화를 이뤘다. 누가 봐도 얼굴에 '스윙 고수'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분께서 왜 하필 이런 누추한 곳까지. 


"저 오늘 처음 왔어요."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참사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는 그 팔러에게, 나는 반쯤 끌려 나오는 모양새로 댄스홀 언저리에 섰다. 음악을 들으며 언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 팔러는 능숙하게 카운트를 세주며 들어갈 타이밍을 잡아줬다. 다행히 처음 서너 번은 정박으로 스텝을 밟았다. 하지만 간주 부분에서 역시나 박자가 꼬였다. 그 팔러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나를 안심시켰으나 잔뜩 긴장한 탓에 나는 그만 실수로 팔러의 발을 밟아 버렸다.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순간 내 시간이 멈췄다. 음악이 사라지고 일순 내 세상만 음소거로 변했다. 1초의 시간을 수백 개의 프레임으로 쪼갠 듯, 내 1초가 수백 배 느리게 흘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팔러의 표정에 시선이 고정됐다. 팔러는 아주 잠깐 표정을 찡그렸지만 곧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팠을 텐데도 오히려 내게 당황할 필요 없다며 안심시키고는, 다시 '원, 투, 스리, 포'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는 채로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본 스텝을 밟았다. 아마 그날 그 팔러의 표정이 1~2초만 더 늦게 풀렸다면 나는 그날 스윙을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음악이 끝나고 다시 한번 더 고개 숙여 사과한 뒤에 자리로 돌아왔다. 그 팔러는 다행히 곧바로 다른 리더의 홀딩 신청을 받고 음악에 맞춰 다시 종전의 화려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아 그제야 좀 안심이 됐다. 하지만 나와 춤을 출 때는 기본 스텝밖에 밟지 못하던 팔러가 다른 선배의 리딩에는 날개를 단 듯 날아다니기 시작하자 알 수 없는 열패감이 밀려왔다. 나의 서투름이 그 팔러의 날개를 꺾어 버린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2~3시간에 달하는 제너럴 때 춤을 추는 시간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다. 나처럼 '제너럴 포비아'가 생긴 다른 리더들과 자리에 앉아 "입장료 8000원 내고 들어와서 두 번 춤추면 한 번 출 때 4000원이네"와 같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맥주만 마셔댔다. 내게 스윙 동호회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던 친구와 서로 "야 저기 팔러 쉬고 있는데 한 번 신청해봐"라고 서로 등을 떠밀며 패배자처럼 자리에서 맥주를 홀짝였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날 내가 발을 밟은 팔러는 금요일 수업의 팔러 강사였다. 내가 다녔던 스윙 바는 초심자(1학년) 수업이 매주 금, 토, 일 세 번씩 열렀다. 금요일은 서울 강남역 인근 댄스홀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홍대의 댄스홀에서 수업을 듣고 제너럴이 이어졌다. 금, 토, 일 모두 서로 다른 강사 한쌍이 수업을 진행했다. 1학년은 원하기만 하면 추가 비용 없이 세 번의 수업을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 강사들 마다 수업 스타일은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배우는 내용은 같았다. 


팔러 강사들은 제너럴 시간에 나처럼 앉아 있는 리더들에게 먼저 홀딩 신청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팔러와 달리 초심자인 리더들은 웬만한 배포가 있지 않은 이상 홀딩 신청에 겁을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팔러가 내게 홀딩 신청을 했던 것은 내가 '이런 누추한 곳'이었기 때문이었고, 발을 밟혀도 능숙하게 대처했던 것도 오랜 경험을 통해서 나 같은 리더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내가 '제너럴 포비아'를 극복한 뒤에는 나도 1학년 테이블 근처에 가서 한 두 타임 이상 쉬고 있는 팔러들에게 일부러 홀딩 신청을 하곤 했다. 초심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내가 월등하게 여유로웠지만 이 팔러들이 3~4개월만 지나면 나보다 훨씬 더 스윙을 잘 추게 될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저녁 7시30분쯤 제너럴을 시작하고 90분쯤 지났을 때 음악을 틀어주던 DJ 부스에서 사회자가 "오늘 생일인 사람 나와주세요"라는 방송을 했다. 홀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원을 만들고 그 안에 팔러 몇 명과 리더 몇 명이 들어갔다. 그 주에 생일인 리더와 팔러들이었다. 스윙 음악 중에서 빠른 템포의 생일 축하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고 생일인 리더와 팔러들은 짝을 찾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상대와 그대로 춤을 추지 않고 원을 만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생일인 사람에게 춤을 신청했다. 한 곡의 음악이 끝나는 3분여 동안 적게는 4~5명에서 많게는 7~8명까지의 파트너와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생일 축하 곡은 2곡 정도 나왔고 일반적인 스윙 곡보다 빠르고 파워풀한 동작이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작은 공연을 하는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서는 밝은 에너지가 빛처럼 번져 나왔는데 그 빛이 가장 화려하고 밝게 빛나는 시간이 생일 축하 시간이었다. 


생일 축하 곡이 끝나고 선배들의 졸업 공연 안무 메들리가 이어졌다. 여기서는 총 7주의 커리큘럼 중 5주 동안은 수업을 듣고 2주는 안무 연습을 했다. 안무 연습을 하고 거리 공연을 하게 되는데 이미 공연을 했던 선배들이 거리 공연용 안무를 미리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5학년 선배들의 화려하고 빠른 춤부터, 1학년이 하게 될 공연 안무까지가 쭉 이어졌다. 자유롭게 춤을 추는 제너럴과 달리 정해진 안무를 여러 커플이 일사불란하게 진행하는 모습도 나름 장관이었다. 졸업 공연 안무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라인댄스'가 이어졌다. 라인댄스는 일종의 플래시몹처럼 어떤 음악이 나오면 그 음악에 짜맞춰진 안무를 사전에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팔짱을 낀 채로 보고 있다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후 얼마 동안 제너럴 시간이 이어지고 잠시 뒤에 다시 한번 안내 방송이 나왔다. 1학년은 뒤풀이 이동을 먼저 하니 조장을 중심으로  홀을 나가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춤 구경도 슬슬 지루하던 차에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옷을 챙기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에 건물 밖에 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조원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조장을 중심으로 조별로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하는데 마치 다시 대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개강 파티를 하기 위해 과대표를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1학년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살구향을 찾아 코를 킁킁 거렸다...,는 농담이고 오늘님이 나오길 기다렸다. 은근슬쩍 오늘님이 속한 조 근처에서 배회하다 적당히 타이밍을 잡고 물었다. 


"오늘님, 뒤풀이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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