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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Feb 29. 2020

4th step- 재밌는 뒤풀이는 매주 있어

feat. 곰돌이 푸 

"저 내일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 갈 거 같아요."


"아, 네. 다음 주에 또 봬요." 


아쉬웠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다음을 기약했다. 세상일이란 게 원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형마트에서 내가 선 줄은 가장 늦게 줄어들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마음에 쏙 드는 티셔츠를 발견해도 12가지 색상 중 내가 사려고 하는 색상만 품절이다. 매력적인 사람도 그렇다. 으레 궁금증과 비밀을 남기고 사라진다. 토요일 밤 10시에 따로 만날 사람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일 아침부터 소개팅이라도 하는 걸까. 어쩌면 토요일 밤 10시 이후에만 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아르바이트(?)가 있는 걸지도. 큰일이다. 상대방의 '부재'가 신경 쓰인다는 건 내가 그 사람에게 빠졌다는 증거다. '사랑이 무서운 것은 그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버린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상대에 대한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을 때 나는 내가 '시공간 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써서 최종 확진을 내렸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시간과 공간이 궁금해졌다면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다 문득 그 사람의 점심 메뉴와 동행이 궁금해진다거나, 주말에 혼자 영화를 보다 갑자기 그의 취미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사랑에 심각하게 빠진 연인은 '지금의 부재'를 넘어 '과거의 부재'에 집착하기도 한다. 나와 함께 하지 않았던 애인의 과거 시공간에도 질투를 느낀다. 가령 남자 친구가 전 여자 친구와 180일을 사귀다 헤어졌다면 181일째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묘한 승리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기도 바쁜 나로서는 처음 그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반대로 연인 사이 일지라도 상대방의 부재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면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상대가 없는 '미래의 부재'가 두렵지 않은 것이다. 


첫 수업이라 그런지 뒤풀이 인원은 적게 잡아도 30명은 넘어 보였다. 조장의 인솔 하에 우리는 홍대역 인근의 한 치킨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친구와 나는 일부러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색함을 핑계로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 될 것도 안 된다. 배수의 진을 쳤다. 어차피 인생은 독고다이. 물론 내가 여기 싸우러 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 테이블에는 리더 3명과 팔러 1명이 앉았다. 술과 안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귀찮은 걸 싫어하고 게으른 탓에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포문을 열어주길 바라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경우엔 총대를 멘다. 옆자리에 앉은 리더의 호구 조사부터 시작했다. 팔러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보다 진입장벽이 낮은 리더부터 시작하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하다. 닉네임과, 직업, 사는 곳, 스윙댄스를 시작한 이유 등등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하지만 사실 서로 크게 궁금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나도 그냥 'IT 회사를 다니는 나보다 어린 친구' 정도의 정보만 기억했다. 


"하루님은 무슨 일 하세요?"


내 대각선에 앉아 있던 리더가 물었다.


"저는 출판사에서 책 팔고 있어요."


"책 좋아하시나 봐요?"


내 맞은편의 팔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막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인기가 없어서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긴 했어요." 


팔러의 닉네임은 '시노'였다. 주로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그녀는 닉네임도 일본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히가시노는 1985년 데뷔한 이후 장편을 포함해 매년 두 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는 '다작왕'이지만, 책 한권 한권의 퀄리티도 상당한 걸로 유명하다. 내 경우 추리소설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의자 X의 헌신'이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같은 그의 대표작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일상의 대화에서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책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내 상상 이상으로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책이 돈벌이가 되고 나서부터는 책 자체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버렸다. 


흥미로운 것일수록 의무와는 거리가 멀다. 시험 기간에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뉴스가 재밌는 것은 시험이라는 강력한 중력(의무)이 생겼기 때문이다. 재미의 상대성은 의무에 반비례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종종 가슴 성형을 전문으로 하는 남자 성형외과 의사나, 비뇨기과를 전문으로 하는 여자 의사의 연애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들곤 한다. 적어도 나는 비뇨기과 전문의의 남자 친구만은 되고 싶지 않다. 


"아, 용의자 X의 헌신은 저도 영화로 봤어요." 


IT 회사가 말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이런 술자리에서는 확실히 책보다는 영화가 대화의 소재로 훨씬 적합하다. 한동안 영화 얘기가 이어졌다. 자신들의 영화 취향, 최근에 봤던 영화 이야기가 이어졌다. 시노는 최근에 개봉한 영화 '셜록'을 봤다고 했다. 동명의 드라마가 대박을 치자 같은 주인공을 내세워 최근에 개봉한 영화였다. 시노는 소설보다는 드라마가 별로고, 영화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별로라고 했다. 영화를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책 이야기를 하느라 앞서 의도치 않게 대화의 지분을 많이 가져갔었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쯤에서 나는 IT 회사와 나머지 두 명의 직업도 알게 됐다. 시노는 외국계 회사에서 온라인 마케팅을, 내 대각선에 앉은 리더는 게임회사에서 개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까먹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닉네임을 다시 한번 외웠다. 시노, IT, 게임. 물론 시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닉네임이 아니었지만. 소재가 고갈됐는지 IT 회사가 내게 말을 돌렸다.


"하루님은 최근에 무슨 영화 보셨어요?"


한동안 영화관에 가지 않아서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작년에 본 '내부자들'이었다.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치맥을 하면서 오늘 처음 본 남녀에게 언급할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최근에 본 영화는 없구요, 전 우디 앨런 영화 좋아해요. '미드나잇 인 파리' 같은 거요. '500일의 썸머'도 재밌게 봤구요." 


경험상 내 또래의 여자 4명 중 1명은 우디 앨런을 좋아했다. 그리고 50% 이상의 여자는 500일의 썸머를 좋아하거나, 적어도 싫어하진 않았다. 시노는 나머지 25%에 속하는 듯했다. 우디 앨런에게도, 조셉 고든 레빗에게도 큰 흥미는 없어 보였다.  


500cc 맥주잔이 비어 가고 치킨이 줄어들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중간중간 동호회 특유의 건배사 구호가 이어지고 그날 강사를 맡았던 리더가 테이블을 돌며 분위기를 주도해줬다. 강사의 닉네임은 '케이'로, 스윙 경력이 거의 10년 가까이 돼가는 베테랑이었다. 20대 중반에 스윙을 시작한 모양으로 나보다는 3살 위였다. 수강생이 가장 많은 1학년 토요일 수업을 거의 고정으로 담당하는 동호회의 간판 강사 쌤이었다. 우리 테이블에도 순회를 온 케이 쌤은 간단히 닉네임을 물어보고 바로 파도타기를 시전 했다. 


"지금 시간 11시 32분, 죽음의 파, 도, 타, 기. 시노부터 오른쪽으로."


두 번 정도 파도가 더 치고 나서 내 친구가 우리 테이블로 왔다. 녀석은 별로 재미가 없었는 모양인지 내게 언제 갈 거냐고 물었다. 자정이라 이미 지하철은 끊겼을 시간이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택시를 타면 택시비를 좀 아낄 수 있었다. 


"난 오늘은 좀 더 놀다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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