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에드 시런
택시비를 조금 더 쓰더라도 첫 뒤풀이인 만큼 나는 남기로 했다. 친구는 택시를 타고 먼저 갔다. 내게 스윙댄스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던 녀석은 그 이후에도 스윙에는 큰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패션'이라는 닉네임처럼 매사에 열정과 에너지가 넘쳤지만 스윙과는 잘 맞지 않는 듯했다. 녀석은 결국 7주 수업의 절반 정도를 나오다 완전히 그만뒀다. 졸업 공연의 파트너 선정을 앞두고 있던 수업 막바지 즈음 녀석과 동네에서 술을 마시며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스텝 밟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
표면적인 이유였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녀석은 그날 이후 몇 차례 뒤풀이에 가서도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한약을 먹고 있어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헬스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뒤풀이에서도 안주로 계란찜이나 비계가 적은 고기 같은 걸로만 먹곤 했다. 녀석은 내게 술을 마시는 게 석 달 만이라고 했다.
패션은 한 일간지의 정치부 기자였다.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처럼 수완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일이었다. 기자를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커다란 페널티라는 말을 들었는데 녀석은 '마셔야 될 일이 있을 때만 세게 마신다,고 했다. 직업적 특성도 있겠지만 녀석은 내가 아는 세상 누구보다 '판'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시스템의 표면보다 그것을 돌리는 그 안의 메커니즘, 사람들이 보여주는 예의나 매너의 가면 너머 그 안의 진짜 욕망을 보는 눈의 남달랐다. 두 번째 소주병이 반쯤 비워졌을 때 녀석은 스윙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라고 말문을 열었다.
스윙댄스 동호회인 만큼 춤을 잘 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딱히 스윙댄스가 재미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곳에 오래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더 낫다, 라는 것이 녀석의 판단이었다. 녀석은 스윙댄스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여자 친구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더 컸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람을 골라내는 눈과 그에 맞는 환경, 비교우위에 서는 경쟁력과 실천력이 필요한데 이곳은 적어도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말에 영어회화 스터디를 새로 시작했다는 녀석은 수업을 신청할 때 일부러 남자 강사의 수업을 골라 듣는다고 했다. 이미 영어를 굉장히 잘했기 때문에 그 수업의 목적도 결국은 스윙댄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같은 돈이면 예쁜 여강사의 수업을 듣는 게 좋지 않아?"
패션은 '지금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야'라는 듯한 표정으로 내 질문의 어리석음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나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수업을 신청할 게 뻔하다. 예쁜 강사의 수업은 결국에는 나 같은 녀석만 득시글할 것이고 강사는 그런 녀석들을 수도 없이 봐왔을 것이다. 예쁜 강사 입장에서는 돈을 버는 직장인데 누군가와 엮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반대로 훈훈한 남자 강사의 수업에는 높은 확률로 여자가 더 많다,는 것이 녀석의 설명이었다. 2년째 연애를 쉬고 있는 나와 달리, 바로 직전 최근 연애를 끝내고 현재도 2~3명과 썸을 타며 7~8명과 연락을 하고 있다는 녀석은 과연 시작점 자체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책으로 연애를 배우고 있을 때 녀석은 실전에서 경험을 쌓으며 자기만의 오답노트를 만들고 있었다. 녀석은 요즘도 한 달에 적어도 한 두 번은 클럽에 가서 '실전의 감'을 익힌다고 했다. 이렇게 복잡하게 살면 좀 피곤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어쩌면 녀석에게는 단순한 습관 혹은 관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친구로서는 흥미로운 자극을 주는 녀석이었지만, 내게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선뜻 소개해주기 어려운 그런 타입이었다.
패션은 떠났지만 나의 전쟁은 계속됐다. 치킨집에서의 1차가 마무리되고 뒤풀이 멤버 대부분이 2차를 위해 인근에 있는 횟집으로 이동했다. 뒤풀이 인원이 대규모였기 때문에 맛집이라기보다는 단체석 예약이 가능한 그런 식당이었다. 자정을 넘어 2차를 올 정도면 이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취해있었기 때문에 사실 음식의 맛이나 질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가게에 들어간 순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면면이 모두 바뀌었다. 팔러들은 수업을 들으면서 적어도 두세 번씩은 마주쳤기 때문에 낯이 익었지만 리더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확실히 1차 때 보다 분위기가 많이 풀어져 있었다. 테이블 별로 매운탕, 새우튀김, 광어회 같은 안주를 시키고 술자리를 이어갔다. 동호회의 단골 가게인 모양인지 우리 테이블 너머로 다른 학년의 사람들도 시끌벅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 건너편에서 고학년의 강사로 보이는 한 팔러가 술잔을 들고 "썬업 갑시다"라고 외쳤고 우리 쪽의 강사들도 "썬업 고고!"를 외쳤다.
여기서는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을 '썬업'이라고 불렀다. 썬업 말고도 동호회의 결속력을 높여주는 몇몇 은어들이 있었는데 가령 이곳에선 스윙의 기본 스텝을 '지터벅'이라는 말 대신 '락스텝'이라고 불렀다. 지터벅은 단어 자체로는 '미친 듯이 춤추는 벌레들'이란 뜻이지만 보통 초보 스윙댄서의 입문 스텝을 칭할 때 쓰인다. 또 스윙댄스를 추지 않는 사람을 '머글'이라 부르거나 오랫동안 스윙을 추면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을 '병술춤'이라고 불렀다. 병술춤은 말 그대로 '병신 같이 술만 먹고 춤만 춘다'는 의미였다.
매운탕 국물을 떠먹으며 오늘 처음 본 사람들과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소주를 마시다 보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때의 설렘과 기대감 같은 것들. 과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스윙댄스'란걸 알게 되고, 무슨 연유로 하필 이번 학기에 신청해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됐을까. 1차와 달리 상대방의 직업을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로 나이도, 배경도 모른 채 닉네임을 묻고는 바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굳이 남녀 관계가 아니더라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은 매번 봐 온 사람과 달리 더 흥미로웠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만큼 상대에 대해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것도 좋았다.
새벽 2시를 넘길 무렵,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팔러 한 명이 먼저 일어났다. 신도림역 쪽에 산다는 팔러였다. 집에 가려면 어차피 나도 신도림을 지나서 가야 했지만 굳이 따라나서진 않았다. 오늘 처음 봤는데 그쪽에서 괜히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나 역시 선뜻 동행을 제안할 정도로 넉살이 좋은 성격은 못됐다. 어느 정도 술도 올라오고 피곤하기도 해서 3시쯤 나도 일어났다. 카카오 택시를 부르고 택시에 타자마자 거의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스윙댄스 동호회에서의 첫 하루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