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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Apr 01. 2020

6th step-휴일에 해야 할 일들이 내게도 생겼어

feat. 김종서 

'카톡, 카톡, 카톡.' 


출근길 지하철에서 카톡 알람이 계속해서 울려댔다. 지난 몇 년간의 아침 출근길에 없던 일이었다. 회사 사람 일리는 없다고 생각하며 창을 열어봤더니 지난 주말 제너럴을 하기 전에 만들었던 조별 카톡방이었다. 조장이 먼저 인사와 함께 복숭아 모양의 카톡 캐릭터 이모티콘을 올리자 한 두 명씩 자기가 좋아하는 이모티콘을 올렸다. 대화 상대 목록을 보니 8명 정도가 들어와 있었다. 한 명 한 명 클릭해서 사진을 확인해 봤다. 팔러들은 대체로 기억이 났고 리더들도 한 두 명은 이야기를 나눠서 얼굴이 익었다. 사진이 없는 두 명은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침인사 행렬에 동참할까 하다 알람 설정을 무음으로 바꾸고 창을 닫았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나는 게으르고, 신중하다. 귀찮은 걸 싫어하지만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한 없이 귀찮은 일을 떠안을 때도 있다. 어떤 카톡 방은 흘려 보지도 않지만 또 다른 방은 새 알람이 없어도 하루에 여러 번을 보기도 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기본적으론 일관되지만 때론 모순된다. 


내 생에 첫 동호회 활동은 아침의 예상치 못한 카톡 알람음처럼 내 일상에 작은 변화들을 여럿 불러왔다. 출근을 한 뒤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고 급한 답장을 보낸 후, 유튜브에 들어가서 '스윙댄스'를 검색했다. 몇몇 영상들을 살펴보니 제너럴 때 선배들이 추던 춤, 그 이상이었다. 어차피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딱히 부럽다거나, 나도 저만큼 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들지 않았다. 지금 수준에서 내가 부러운 건 ‘맥주 김 빠지기 전 홀딩 때리는 사나이, 썬업 하고 지하철 타고 집 가는 사나이, 그런 사나이’였다. 


집에 가는 길에 신호등을 기다리며 첫 주에 배웠던 지터벅(락스텝) 스텝을 나도 모르게 조용히 밟고 있었다.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까 봐 스텝을 크게 밟진 못했지만 리듬과 박자를 연습하기에는 충분했다. 당구에 빠지면 누워서도 천장에 당구공이 굴러가는 게 보인다든데 그것과 비슷한 증상 같았다. 그러고 보니 중학생 때 봤던 일본 영화 '쉘 위 댄스'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무기력한 가장이었던 중년의 한 남성이 댄스에 빠져 삶의 활력을 찾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 역시 댄스에 빠진 뒤 횡단보도 앞에서 댄스 스텝을 밟으며 잃었던 일상의 웃음을 찾아간다. 어쩐지 그 아저씨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주말을 앞둔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또다시 카톡 알람 공격을 받았다. 확인해 보니 지난주 토요일 뒤풀이에 갔던 사람들을 초대한 정산 방이었다. 그날 나왔던 술값을 누군가 대표로 결제하고 사람 수대로 나눠 각자 몫을 보내기 위한 방이었다. 초대된 사람들의 목록을 살펴보니 이미 등록이 된 우리 조 사람 말고도 한 팔러의 프로필 사진이 밝게 표시돼 있었다. 시노였다. 생각해 보니 그날 뒤풀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시노가 번호를 물어봐서 서로 번호를 교환했던 것 같았다. 카톡 프사를 보니 해외에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 여럿 보였다. 뉴욕 타임스퀘어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몇 년 전 나도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게 생각났다. 나는 가본 적이 없지만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에 나왔던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스윙이 만든 일상의 변화도 어쩐지 여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여행이란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오랜 반복을 통해 익숙해진 생활의 습관은 편하긴 하지만 새로운 자극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여행지에 가서는 '햄버거를 주문해 먹는 일' 조차 긴장되고 설레는 일이 된다. 익숙한 환경에서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지만 여행지에 가서는 한 끼 한 끼가 새롭고 의미를 갖는다. 낯선 환경에 놓이는 것만으로 나 자신 조차 변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환경, 아무도 나를 모르는 장소에서 나는 조금 더 과감해지고, 더 이상 나 자신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행지에 가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사람 깊숙한 곳에 있는 내면의 코어 같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 2010년 캐나다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 도쿄에 들렸다. 한 학기 동안 같이 캐나다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일본인 친구 미사키를 만나고 관광도 할 작정이었다. 미사키에게 페이스북 메신저를 보내 신주쿠 역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한 날 신주쿠 역에 가고 나는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신주쿠 역이 이렇게 거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만나기로 한 출구조차 정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말을 걸고 핸드폰이라도 빌릴 생각이었으나 영어로 묻자 모두 도망갔다. 간신히 양복을 입은 내 또래의 남자에게 핸드폰을 빌려 미사키와 통화하고 만날 수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미사키와 함께 도쿄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침에는 한국의 노량진 같은 츠키지 수산시장에서 2시간을 넘게 기다려 난생처음 오마카세 초밥을 먹었다. 일본 후지 TV를 견학하고, 도쿄에서 가장 예쁘다는 다리를 구경하고, 줄 서서 먹는 제과점의 디저트도 먹었다. 당시에는 도쿄타워보다 높은 스카이 트리라는 건축물이 공사 중이었는데 그 근처에서 산책을 하며 사진도 찍었다. 해가 지고 나서는 도쿄도청의 옥상에 올라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봤다. 운이 좋았는지 그날 도쿄의 밤하늘은 유독 깨끗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뭔가 아쉬워하는 듯한 미사키에게 나는 '오늘 같이 있을래?'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지하철 역 앞에서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미사키와 둘 만의 스카이 트리를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나는 알면서도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헛발질을 하는 건 내 인생의 변하지 않는 테제 같은 것이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여자 선배와 단 둘이 늦게까지 술을 먹고 적당히 취한 선배의 '라면 먹고 갈래?'라는 물음에 '안주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요.'라는 대답이 튀어나오고야 마는 것이다. 라면의 함의를 모를 만큼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라면의 맛을 몰랐고, 짝사랑하는 여자애가 있는데 다른 사람과 라면을 먹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짝사랑했던 여자아이는 과에서 유명했던 남자 선배와 사귀면서 김밥천국을 차려도 될 만큼 많은 양의 라면을 먹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좋아한다는 말은커녕 그런 내색도 못 했다. 


다시 토요일이 왔다. 나는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홍대역 근처에 있는 댄스홀에 갔다. 수업은 6시에 시작이었지만 주말에 딱히 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정시에 수업을 시작했지만 오늘님은 그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수업 초반은 이날 처음 온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닉네임과 연관된 가벼운 모션을 하며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소개를 절반쯤 하고 있을 때 입구에서 오늘님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수업이 끝나고 제너럴 시간에는 대부분 앉아 있었다. 오늘님과 말을 섞을 기회를 틈틈이 엿봤지만 오늘님이 계속 홀딩 신청을 받는 바람에 기회가 별로 없었다. 잠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말을 걸까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앉아만 있자 시노 님이 먼저 홀딩 신청을 해줘서 8000원짜리 춤을 출 수 있었다. 다시 테이블에 앉아 얼핏 들으니 오늘님은 어딘가의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모양이었다. 살구향의 수수께끼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한 리더가 오늘님에게 뒤풀이를 갈 건지 물었다. 


"네, 지난주에 못 가서 오늘은 가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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