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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Apr 25. 2020

7th step-여행, 체스, 낚시 그리고 루저

여행의 설렘은 그 여행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행지의 동선을 짜고, 점심과 저녁의 메뉴를 정하는 것은 물론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우연한 인연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까지. 상상 속에서는 이국의 작은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조차 낭만적이고 특별한 추억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상상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에어컨이 고장 난 객실이나, 환전할 때 100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슬쩍하는 사기꾼은 등장하지 않는다. 뒤풀이를 여행에 비유하자면 단체 패키지 같은 거겠지만, 동행에 오늘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지루한 패키지 여행이 아닌 어쩐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가 생겼다.


초급반 수업의 뒤풀이 안내 공지 방송이 나오고 뒤풀이에 갈 사람들이 홀 입구에 모이기 시작했다. 첫 주 수업에서는 보지 못했던 몇몇 팔러들이 눈에 띄었다. 1학년 수업은 금요일엔 강남역 인근 홀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엔 홍대역 인근 홀에서 총 3번이 열렸는데 별다른 추가 요금 없이 세 번의 수업을 중복해서 듣는 것도 가능했다. 몇몇 팔러는 주로 금요일 수업을 듣는 모양으로 오늘(토요일)은 홍대로 탐방을 온 것 같았다. 어딜 가도 주목을 받을 것 같은 예쁜 얼굴의 한 팔러가 리더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뒤풀이 멤버들의 면면을 둘러보고 있는데 지난주에 얼굴을 익힌 IT가 알은체를 했다. IT는 하루 전인 금요일 수업도 들은 모양이었다. 강남 수업 뒤풀이 멤버들과 3차까지 술을 마시고, 노래방도 간 뒤에 아침에 해장국을 먹고 다음날 오전 10시가 지나서야 헤어졌다고 했다. 집에서 자고 좀 쉬다가 씻고 나서 바로 오늘 수업에 나왔다는 것이다. 피곤할 만도 한데 뭐가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지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스윙댄스라는 새로운 세계가 들어오면서 내 생활도 조금은 들뜨고 있었다. 다양한 사연과 배경을 갖은 사람들과 새롭게 알게 되는 일 자체도 흥미로웠고, 개중에는 조금 더 특별히 관심이 가는 사람도 있었다. 제너럴 중간 대표 리더 강사인 케이 쌤이 공지 안내와 함께 동호회를 소개할 때 "1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3200 커플이 탄생했고, 340 커플이 결혼했다"는 고정 멘트를 하곤 했다. 스윙댄스 자체도 즐겁고 신나는 일이지만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그 언급의 의미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미지의 사람을 새로 알아가는 과정도 하나의 여행과 같았고, 그 여행의 종착역이 연인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을 것이었다.


이날 뒤풀이 장소는 홍대역 8번 출구 인근에 있는 삼겹살 집이었다. 석유 드럼통을 개조한 듯한 식탁을 쓰는 옛날 느낌의 분위기였다. 오늘은 가능하면 오늘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작정이었는데 순서대로 자리를 채우다 보니 오늘님은 가장 안쪽에 앉고 나는 가장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게 됐다. 앉고 싶은 자리를 쟁취할 만큼 의욕적인 행동파는 아니었기 때문에 혹시 기회가 생기면 그때 오늘님과 이야기를 나눌 작정이었다. 하지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1차가 끝날 때까지 오늘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오늘님 테이블에는 오늘님에게 오늘 뒤풀이를 올 것인지 물었던 리더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오늘님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풍채가 좋고 인상 좋아 보이는 체형에 주말에는 스윙댄스보다 조기 축구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나는 속으로 녀석을 축곰, '축구하는 곰'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축곰은 어쩌면 벌써 머릿속으로 오늘님과 3201번째 커플이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적극적이고 무모한 행동파의 반대편에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적당한 상황이 발생해주길 기다렸다. 우연히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급속하게 가까워지는 요행을 바랐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언제나 아무런 이벤트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고, 그러다 보면 여지없이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들은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저 멀리 앞서 가곤 했다.


오늘님이 축곰의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은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사람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만약 축곰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내가 존재조차 모르는 누군가가 오늘님과 사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체스로 비유하자면 나는 실제 게임에 참전하는 대신 상상의 플레이만 진행하며 폰과, 나이트와, 락과, 퀸을 하나씩 잃어가는 와중에 신의 한 수 같은 체크메이트가 요행으로 터지길 바라는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게임이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 승과 패의 전적을 충분히 쌓아온 사람의 승률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게임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지지도 않지만 이길 수도 없다. 특히나 관계의 게임에서 패배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단 1승, 단 한 번의 체크메이트면 충분하다.


2차는 자리를 옮겨서 1980년대 감성의 오래된 포장마차 콘셉트의 지하 술집으로 들어갔다. 배를 채운 사람들은 김치 치즈전, 콘치즈, 오뎅탕 등 가벼운 안주 위주로 시키고 소주와 맥주병을 비워나갔다. 다행히 2차에서는 오늘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오늘 님의 옆에는 축곰이 한 자리를 차지했고, 내 옆에는 IT가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뒤풀이에는 시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수업과 제너럴 때는 있었는데 오늘은 먼저 간 모양이었다. 패션은 이날 스윙댄스 대신 이태원 어딘가의 클럽에서 몸을 흔들고 있을 것이었다.


"낚싯대가 하나밖에 없는 낚시꾼은 어떤 물고기도 낚기 어렵다."


패션은 종종 내게 이렇게 말했다. 패션이 보기에 나는 기본적으로 튼튼한 낚싯대조차 하나 없는 상태였다. 상위 포식자들이 수 십 개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입질을 기다릴 때 나는 오리발도 없이 물에 뛰어들어 작살로 물고기를 잡으려는 초짜 어부였다. 설령 내게 낚싯대가 있다 하더라도 낚싯대가 하나밖에 없는 나는 하루 종일 그 낚싯대만 쳐다보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니디(needy)하고 애정 결핍인 매력 없는 수컷이었다. 수 십 개의 낚싯대를 보유한 알파 수컷이 입질을 기다리며 자기 개발을 하고, 투자를 해서 돈을 불리고, 몸을 만들 때 나는 낚싯대 하나만 쳐다보며 '세상에는 아직 진실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야'라고 자위하는 루저였다. 패션은 내게 정신 차리라고 여러번 말했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애써 덤덤한척하며 패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축곰은 녹슨 축구 골대의 철봉에 얼기설기 낚싯줄을 매달은 것 같은 낚싯대를 오늘님 앞에서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님은 큰 흥미가 없어 보였다. 어찌 보면 의미 없는 몸부림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축곰은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축곰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에 반해 나는 아직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축곰이 애써준 덕분에 오늘님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이는 서른, 국내 한 화장품 회사의 소비자 리서치팀 근무. 사는 곳은 김포 신도시.


"오늘님, 저랑 방향이 같으시네요. 저도 인천 쪽 살아요. 이따 같이 가실래요?"


별다른 미끼는 없었지만 그날 나도 처음으로 내 낚싯대를 던졌다. 답변이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요. 저 이따 막차 시간 전에 갈 건데 12시쯤 같이 일어나실래요?"


그때 패션에게 카톡이 왔다. 진한 화장에 붉은 입술을 한 선이 굵은 미녀, 노란 머리에 단발, 긴 생머리에 눈이 큰 동양적인 미녀의 사진 세 장이었다. 아마 그날 클럽에서 만나 연락처를 교환한 여자들일 것이었다. '남자 하나 부족한데 올래?'라는 패션의 물음에 나는 답장을 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 패션에게 그의 방식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네, 한 10분 정도 있다 같이 가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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