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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Oct 09. 2023

8th step-졸업 공연 파트너 하실래요?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연애 시장에서 '인기남'과 '찐따남'을 가르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전자는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길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 번호를 물어보는 상황에서 인기남은 긍정적인 상황과, 부정적인 상황, 그 밖의 상황에 대한 나름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두고 움직인다. 하지만 찐따남은 '번호를 물어본다는 행동' 자체만으로도 버겁기 때문에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찐따남이 모든 용기를 쥐어짜 번호를 물어봤는데 상대방이 "남자 친구 있는데요."라는 말을 하게 되면 그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얼떨 결에 오늘님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물어보긴 했는데, 막상 오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들으니 순간 당황해서 잠시 동안 사고가 정지됐다. 질문을 하면서도 무의식 레벨에서는 긍정의 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막상 너무 쉽게 대답을 들어버리자 스스로도 놀랐던 것이다.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테이블의 축곰과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자정이 다가오자 오늘님이 먼저 일어섰다. "막차 타려면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하루님 같은 방향이면 같이 가요".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막차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축곰이 따라나설까봐 걱정됐지만 축곰은 인천 방향은 아닌듯했다. 


오늘님과 함께 홍대입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제로 막차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적당히 취한 탓인지 역으로 가는 동안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주로 지난 몇 주간 스윙댄스를 하면서 생긴 여러가지 변화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홍대입구역 지하도를 서둘러 내려갔으나 막상 역에 도착하니 이미 인천행 막차는 떠난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역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택시를 잡고 나는 조수석에, 오늘님은 뒷자석에 앉았다. 


얼굴을 보지 않은채로, 택시 안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루 님은 무슨일 하세요?" 

"저는 출판사에서 일해요." 

어딘가에서 들어 오늘님의 직업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척 되물었다. 알고 있던데로 화장품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직업 이야기를 거쳐 대화의 주제는 좋아하는 책과 영화, 성격과 취향 등 조금은 사적인 영역으로 옮겨갔다. 뒷풀이 자리에서 나는 가볍고 재미있는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막상 둘 이서 대화를 이어갈 땐 차분한 텐션을 유지했다. 


스윙댄스 수업을 들을 때나 강의실에서는 꽤나 멀게만 느껴지던 오늘님과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둘 사이에 택시 기사님은 없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자정이 넘은 시간의 고속도로는 아쉬울 정도로 차가 없었고, 택시 기사님은 야속하게도 능숙하고 빠르게 우리를 목적지로 실어 나르는 중이었다. 


내려야할 장소가 다가워오자 나는 마음 속으로 몇번 되새김질을 한 뒤에 태연한척 질문을 던졌다.

 

"오늘님 혹시 졸업공연 파트너 없으시면 저랑 하실래요?"


졸업공연이란 약 두 달간의 스윙댄스 수업을 받고 2주 정도 연습한 뒤에 파트너를 정해 야외에서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졸업공연을 위해 연습을 하는 1~2주 정도에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진다. 졸업공연의 의상을 상의하고, 연습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연락할 일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는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시속 100km로 달리는 택시의 속도가 잠깐 멈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천히 달리는 것 같았다. 찰나의 침묵을 깨고 대답이 돌아왔다. 


"아, 네 그래요. 졸업 공연 같이 해요."  


오늘 님의 대답을 듣고 잠시 뒤에 내가 먼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김포까지 가는 나머지 택시비까지 치르고 먼저 내렸다. 몇 시간 전까지 올라오던 취기가 말끔히 가신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패션에게 온 카톡을 확인했다. 첫주 같이 수업을 듣고 바로 그만둔 녀석이다. 녀석은 별 말 없이 사진 1장을 내게 보냈다.

 

4번 타자로 유명한 한 프로야구 선수가 홈런을 치는 사진이었다. 상대는 아마도 아까 내게 사진을 보냈던 3명의 여자 중 1명 이거나 다른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어쨌든 녀석은 오늘 밤도 익명의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임을 암시하는 사진을 내게 보내며 본인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딱히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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