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toZ

거래 그리고 사진 찍을 용기

남자 셋 제주 여행기

by 거짓말의 거짓말

"고맙수다, 총각, 고맙수다"


할머니는 민망할 정도로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2000원을 주고 플라스틱 바구니 한 가득 담긴 귤을 샀다.


생전 첫 제주 여행 이틀 차, 드라마 '올인' 촬영지로 유명한 섭지코지 등대로 오르는 중턱에서였다. 참고로 '섭지'는 좁은 땅이라는 뜻이고, 코지는 '곶'의 제주 방언이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찼다.


사실 할머니가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정상적인 거래다. 나는 2000원을 주고 서울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귤을 획득했다. 서울과 다른 점은 귤의 모양과 크기가 좀 제각각이었다는 것뿐이다.


등대로 올라갈 때 할머니는 우리 일행에게 '귤을 사가'라고 권했다. 나는 "추우니까 내려갈 때 살게요"라고 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내려가면서 귤을 샀다. 귤을 산 시간이 오전 9시 30분 정도였는데 할머니는 8시 전부터 나와 있었다고 했다. 8시쯤이면 사실 관광객도 별로 없었을 시간이다. 이때 이후로 할머니들에게 무언가를 살 때는 카드 대신 현금으로 계산했다.


귤을 파는 사람이 할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나, 아줌마, 혹은 아저씨였다면 나는 귤을 사지 않았을 거다. 별로 귤을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비키니를 입은 백인 여자가 '헤이, 스위트(sweet) 보이, 바이(buy) 귤'이라고 했다면 샀을 지도. 물론 이 추운 날 섭지코지 중턱에서 비키니의 백인 여자가 있을 턱이 없고, 그 여자가 '바이 귤'이라는 콩글리시를 말할 확률은 더 없다).


어쨌거나 나는 추운 겨울 아침 출근길에서 (상대를 위해) 전단지를 수집하는 것처럼 귤을 샀다. 동행 두 명은 '착한 척하냐'라고 비아냥댔지만, 턱에 수염 난 짐승 앞에서 착한 척을 할 이유가 내게는 전혀 없다.


짧고, 단순한 거래였지만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11번가에서 11% 할인 쿠폰에 당첨돼 결제를 하거나, 거스름돈을 더 돌려받았을 때랑은 차원이 달랐다.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어떤 용기가 솟았다. 가다 말고 할머니에게 돌아가서, 턱수염 난 짐승 중 카메라를 담당하는 녀석에게 할머니와 사진 한 장을 찍어 달라고 했다.


할매는 '우째, 나랑 사진까지 찍을라꼬. 에구 기여븐 거'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껏 타인이 내 머리를 쓰다듬은 경우가 그리 많진 않지만 그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가장 좋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가 머리 말고 내 다른 곳을 쓰다듬은 적도 몇 번 있는데 그때와 비교해도... 는 물론 농담)


굳이 '용기'라는 말을 쓴 건 평소에 내가 사진 찍는 걸 굉장히 싫어해서다. 사진을 찍고 나서 사진을 봐봐야 기분만 나빠진다. 6년도 넘은 사진을 굳이 SNS와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 둔 건 내 사진을 그만큼 찍지도 않을뿐더러, 그나마 그중에서도 덜 별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기를 앞에 두고 자신이 어떻게 하면 예뻐 보이는지 알고 포즈를 취하는 셀카족이나, 카메라 앞에서 섹시 춤을 추는 아이돌을 보면 그 자체로 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한다. 나는 절대 할 수 없다.


어쨌거나 사진을 찍고 확인을 해봤는데 모처럼 불쾌감이 평소와 달리 굉장히 덜 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할매는 나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볼 수 없을게다. 나는 할매 이메일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마 할매는 이메일도 전화번호도 없을 거다.


할매와 사진을 찍고 내려가는데 아줌마 한 분이 할매에게 귤을 샀다. 할매가 그날 빨리 귤을 다 팔고 집에 가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섭지코지를 떠나 다음 일정으로 옮겨서는 사진을 찍을 때 모자로 얼굴을 가리거나, 턱수염 짐승에게 선글라스를 빌려 가능한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었다. 웃는 사진보다 내가 유일하게 더 참을 수 있는 사진은 뒷모습 사진이다.


+

이날 산 귤은 차에서 동행과 서 너 개를 먹었다. 그리고 그날 하루 밤을 자고 그대로 남아 다음날 게스트하우스를 떠나는 여자애 둘(24세)에게 남은 대부분을 줬다. 그러고도 몇 개가 더 남았는데 나머지는 이날 오후에 컴퓨터 작업을 하기 위해 들린 제주 시내의 다방(카페 아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모두 줬다. 다방에서 총 3시간 정도 있었는데 커피 한 잔이 2000원, 율무차 한 잔이 3000원이었다.


(201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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