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7일 새벽에
*과거의 일기를 옮긴 것으로 일부 거친 표현과 욕설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근원을 알 수 없는 짜증과 불평과 불만 속에 허우적 대고 있는 나를 또 다른 내가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 봤다. 아니 오늘 문득 술을 먹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그냥 그 이유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요즘 나는 '있지 않다'라는 느낌이 든다. 즉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살아는 있다. 하지만 '살아있음'과 '있음'은 엄연히 다르다. 햄릿의 저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영어 원문은 "to be or not to be"로 시작한다. 한 문학 평론가는 햄릿 독백의 바른 번역은 "있느냐 있지 않느냐(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셰익스피어도 그 문학 평론가의 해석에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햄릿의 구조를 살짝만 들여다봐도 햄릿의 아버지는 죽어서 유령이 됐지만 분명히 있다(존재한다). 반면 작품 속에서 햄릿은 살아있지만 있지 않다(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즉 단순히 삶=있음, 죽음=없음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쨌든 그동안 쭉 자신의 있지 않음에 대해 가져왔던 의심들이 요즘 들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만과 짜증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별다른 의욕도 없고 모두 다 시시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가 엄청나게 잘나서 스스로의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난 그 극단에 있는 경우다.
나는 외부로부터 나의 있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타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겸손 따위가 아니라 선척적으로 태어나길) 못나서 스스로의 있음을 자기 완결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외부의 세상 혹은 타인에게 "넌 여기에 정말로 있어"라는 말을 듣고 싶다. 과거에는 불특정 다수 누구라도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그냥 딱 한 사람만 내게 힘을 실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있다고. 비록 지금 살아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냥 여기 내 앞에 있다고."
요즘의 내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굉장히 참고 참아 부드럽게 말한다는 가정하에)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따위는 엿이나 바꿔 처먹어라"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다니, 말도 안 된다. 인간이 생각이 많을 때 결국 다다르게 되는 최종 목적지는 '자기 존재의 부정'이다. 권총의 총구를 아가리에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담기는 모든 멍청한 녀석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놈들뿐이다. 필요 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 똑똑한 녀석들은 매우 훌륭하게 이 세상에 '있으'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악마가 인간의 오감을 조절해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지만 생각하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마더 뻐커 선오브 비치. 인간의 감각, 인간의 몸만큼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의 체온만큼 나 자신의 있음과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두 명의 인간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만큼 상대방의 있음에 대해 안심시켜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물론 짧은 순간의 체온의 교류가 끝나고 서로 떨어져 나오게 되면 그 후에 찾아오게 될 끔찍한 고독감은 전보다 훨씬 더 토악질이 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감각의 기억을 가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한 순간 분명하게 내가 '있었음'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있음'을 연기하는 것이다.
대화가 잘 통한다느니 소울 메이트니 하는 것도 결국은 사이비다. 지금 나와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껴지는 그(혹은 그녀)는 아마 또 다른 상대방을 만나 대화를 해도 상대에게 나와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 것이다. 결국 대화라는 것도 일종의 테크닉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테크닉은 진심이 없으면 없을수록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인간은 바닥을 파보면 모두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진심이 들어가면 허점투성이가 된다. 영화와 소설의 대사가 멋지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테크닉으로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영화와 소설 같은 일이 생기길 바란다. 서투른 사람들은 그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 간격을 줄이는 일에 실패한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 부정과 자기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뿐이다.
어쨌거나 다시 한번, 혹은 한 번만이라도 나의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술을 먹고 취기에 실수로 그런 것일지라도 그때처럼 누군가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어 보고 싶다.
p.s. 어쩐지 조금 어두워졌는데 이런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분위기를 좀 바꿔보자면 어릴 적에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처음 듣고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름이 '섹스'피어래. ㅋㅋ. 초등학교 때는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이름을 듣고 악기 이름이 왜 이리 야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