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사고실험'을 통해 물체의 관성(혹은 그 개념)을 발견한다. 공기 저항과 마찰이 없는 'U' 자형의 곡면에서 공을 굴리면 공은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하며 위치에너지가 0이 되는 동일한 높이까지 올라갈 것이다. 'U'자형 곡면의 한 쪽 기울기를 점점 줄이다 바닥으로 붙일 경우 공은 현재의 운동 상태(속도)를 유지하며 무한히 움직일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과학시간에 배운 내용이다. 현실에서 공기 저항과 마찰이 없는 면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머리 속에선 가능하다.
지금 나는 지난주와 비슷한 시간에 지난주와 같은 장소에 앉아있다. 홍대역 1번 출구 '어덜테슨(아이 같은 어른이라는 뜻)'이라는 카페다. 오늘은 인공지능과 글쓰기에 대한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볼 생각이다.
수학 시간에 무한에 대한 개념을 배우면서 한 가지 예로 등장하는 것이 '원숭이의 타자기'기다. 무한의 원숭이가 랜덤으로 타자기에 아무 단어나 누른다. 무한의 원숭이가 이 작업을 무한히 반복할 경우 언젠가 원숭이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완성할 수 있다. (햄릿은 약 3만 단어로 한 단어에 글자가 5개라 가정하면 15만 개의 알파벳으로 이뤄졌다. 원숭이가 순서를 틀리지 않고 15만 개의 알파벳을 칠 수 있는 확률은 1/26**150,000이다. 26을 15만 번 곱하고 1로 나누면 된다.)
하지만 오늘 내 사고 실험은 무한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유한한데 무한을 가정한 사고 실험은 '내게' 의미가 없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내 세계도 끝이므로 이 세계에도 의미가 없다.
앞서 얘기했듯 내 사고실험은 인공지능과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인공지능은 크게 3종류가 있다. 약 인공지능, 강 인공지능, 초 인공지능. 약 인공지능은 구글이 개발한 알파고와 같이 알고리즘과 프로그램의 영역에 속한다. 강 인공지능은 아직 현존하진 않지만 인간과 같은 판단과 상상 등이 가능한 수준이다. 초 인공지능은 '지식폭발'이라는 과정을 거쳐 등장하게 될 인간의 이해밖에 있는 영역이다.
지난해 영화감독 오스카 샤프는 인공지능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선스프링'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수백 편의 SF 드라마와 영화 대본을 학습했고 인공지능은 이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다면 한 인공지능에 1985년 5월, 내가 태어난 뒤 쓴 모든 글(일기, 수필, 연애편지, 야한 소설 등등)을 입력하고, 인공지능에게 새로운 글을 쓰게 한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그리고 그 글은 진짜 내가 쓴 글과 같을까 다를까. 만약 다르다면 누구의 글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더 뛰어날까.
아마 인공지능이 쓴 글은 미래의 내가 쓸 글과는 다를 것이다. 인공지능은 아마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형태가 바뀐 동어 반복을 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내가 쓴 글이라는 결과물만을 데이터로 갖고 있다. 데이터로 사용된 글은 내 생각 중 일부가 글쓰기라는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 남은 것에 불과하다. 내 생각 전체를 데이터로 가지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미래의 내게 닥칠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가령 미래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강력한 사회적 충격'과 같은 외부 충격에 따라 주제 의식이나 문체를 급격하게 수정할 수도 있다.
만약 인공지능이 나와 동일한 수준의 글을 미래에 쓸 수 있다면 그것은 나 역시 프로그램과 알고리즘을 뛰어넘지 못하는 수준의 동어 반복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에 의해 자가 복제가 가능한 수준의 글 밖에 쓰지 못했다는 의미다.
여기까지는 약 인공지능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만약 강 인공지능 수준의 인공지능에게 내가 쓴 모든 텍스트를 입력하고, 내 뇌의 지도를 복사해 입력한 뒤 글을 쓰게 하면 어떨까. (절반 이상의 과학자들은 강 인공지능이 앞으로 50~70년 내에 출현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유기체의 뇌를 복사하는 작업은 단세포 혹은 다세포 수준의 유기체는 가능하다고 한다. 머지않아 인간의 뇌 복사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인공지능에게 내가 쓴 모든 글과, 현재 내 뇌를 통째로 복사해 집어넣는다면? 그리고 인공지능과 내가 글쓰기 시합을 하면 어떻게 될까?
글쓰기 시합의 룰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암호학자이자 인공지능에 대한 선도적인 논문을 쓴 앨런 튜링의 ‘튜링 테스트’의 조건을 따른다. 튜링 테스트란 간단히 설명해 복수의 인간 전문가가 암실에서 인공지능과 대화를 한 뒤에 그 인공지능이 인간이라고 판단되면 인간이라고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과거 유진구스트만 이라는 인공지능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알려졌지만 후에 테스트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쨌든 다시 인공지능과 나의 글쓰기 시합으로 돌아와 보자. 강 인공지능을 임의로 'HJ'라고 한다. 내가 쓴 모든 활자에 대한 축적된 정보와 심지어 내 뇌를 복사한 HJ는 '사랑'을 주제로 원고지 100매 분량의 단편 소설을 쓰기로 한다. 물리적 타이핑이 필요한 나를 고려해 시간은 30일로 충분하고 넘칠 만큼 준다. 한 달 뒤에 HJ와 나는 각자 완성한 단편 소설을 들고 인간 전문가에게 평가를 받는다. 일종의 글쓰기 튜링 테스트로 '인간적으로' 더 뛰어난 글이 높은 점수를 받는 방식이다.
아마 HJ와 내가 정확하게 같은 글을 쓸 확률은 0% 일 것이다. 나 역시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같은 글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 문체와 분위기는 비슷할지 모르나 주제나 이야기 전개 등도 다를지 모른다. 어찌 됐든 인간 전문가들은 HJ와 내가 쓴 단편 소설을 평가한다.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더 완성도 높고 재미있는 글에 점수를 더 주는 방식이다. 노벨문학상, 나오키상 등 인간의 문학상을 평가하는 기준이 적용된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쓴 글이 HJ에게 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존재 이유가 글쓰기에 있고, 글쓰기를 제외하고 나와 다른 인간을 구분 짓는 것에 의미가 없다고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내 존재 이유인 글쓰기를 잃어버렸으니 나는 그냥 죽어버려야 할까? 아니면 인공지능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더 재미없고, 완성도도 떨어지는 글을 계속해서 써가면서 인간이 쓴 글의 불완전성에 대해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연명해야 할까?
'휴먼스'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다. 보급형 안드로이드가 보급된 근 미래의 이야기다. 대학 졸업을 앞둔 두 등장인물이 골프장에서 이런 얘기를 나눈다.
"저기 로봇들은 칠 때마다 홀인원을 할 수 있는데 하는 거라곤 골프백을 옮기는 정도야. 포르셰로 동네를 산책하고 있는 거라고. 로봇이 인간보다 수술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내가 열심히 살아서 뭐 해"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본 동영상 클립에서 대학자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과 말이 달리기를 하면 인간은 말한테 진다. 하지만 인간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앉혀서 말 위에 올라탔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억, 계산 등에서 인공지능에게 진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과 비교해 인간은 여러 모로 약할지 모른다. 우리(인간)가 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인공지능보다 잘 하는가 못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우리가 창조한 인공지능의 등 위에 올라탈 수 있는가 아닌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