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toZ

파커 스코어와 사람의 매력

-사람의 매력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by 거짓말의 거짓말

< 2013년 9월 9일 작성>



-방금 위험한 여자라고 생각했지?

=그게...

-괜찮아. 어차피 인간이라는 건 모두 조금씩은, 어딘가 이상한 생물이니까.

=마치 그녀가 세계의 비밀,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언어의 정원> by 신카이 마코토 中


비. 맥주와 초콜릿. 구두공이 꿈인 15살 남고생. 미각 장애를 가진 27살의 고전문학 여선생. 그녀의 길고 매끄러운 발. 그리고 그는 알 수 없는 그녀의 비밀.





파커 스코어라는 것이 있다. 로버트 파커가 고안한 와인을 평가하는 점수다. 50점부터 100점까지 와인의 맛과 가치에 점수를 매긴다. 공신력도 상당해서 파커 스코어 100점을 기록한 와인은 훈장처럼 그 점수를 광고에 활용한다. 평가 요소는 다양하다. 풍미, 깊이, 색, 쓴맛과 단맛의 조화, 질감, 그리고 '가능성'. 재미있는 부분은 그 와인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가(가능성) 하는 부분도 채점 요소에 포함된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만약이라는 가정을 깔고) 파커 스코어처럼 인간의 매력을 점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가능성'부분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가가 포함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비밀 부분에 상당한 가중치를 둘 것 같다.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와인 중에 때때로 그 가치가 재평가되는 것들이 몇 있다. 처음 뚜껑을 따고 맛을 볼 때는 별 볼일 없는 와인이지만 그 와인이 공기와 만나 산화되고 맛이 열리는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들이게 되면 마침내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와인의 '비밀'이 열리는 시간 동안 묵묵하게 기다릴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 새로운 영역을 체험할 기회가 주어진다


한 사람의 분위기라든가 향기라든가 하는 것(그러니까 첫인상)은 대체적으로 와인의 첫 한 모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투명한 잔에 와인을 따르고 태양빛에 비춰 와인이 갖는 붉은빛의 가치를 가늠한다. 이어 몇 차례 잔을 흔들어 와인의 풍미를 개방하고 향기를 맡는다. 마지막으로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천천히 혀를 돌리며 와인의 풍미를 음미한다. 굉장히 주의 깊고 세심한 작업이지만 이 작업은 아무리 길어도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나는 시간도 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길뿐이다. 그리고 그 첫 만남 이후에는 우리는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대에 대해 첫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 첫 평가의 점수를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코르크 마개를 여는 순간 모든 향과 풍미를 한꺼번에 개방하는 와인이 있는 것처럼 첫인상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런 타입은 첫 만남의 인상이 누구보다 좋은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쉽게 질리기 쉽다. 애초에 가장 좋은 패를 다 보여줬기 때문에 높아진 역치를 계속 감당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코르크 마개를 여는 순간에는 별 볼일 없지만 맛의 비밀을 간직한 채 때를 기다리는 와인과 같은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강한 인상이 남지 않더라도 보면 볼수록 상대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 비밀은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무엇이 된다. 그 비밀을 알기 전까지 나는 그를 알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릴 수도 없다. 결국 그 비밀을 끝까지 유지하는 한 상대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이 되고 , 그래서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그렇지만 사실 애초에 그에게는 어떤 '비밀' 같은 것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밀과 매력의 선후관계라는 것도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즉 비밀을 보고 싶어 하는 내 눈이 있지도 않은 신기루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비밀이 있어서 상대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멋진 와인은 그 와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멋진 걸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그 와인이 멋진 와인이기 때문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대체로 우리가 멋진 와인이라고 믿는 와인은 파커가 이미 높은 점수를 부여했거나 터무니없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p.s. 사실 '언어의 정원'을 보고 가장 뇌리에 남은 두 가지는 '비밀'과 '여성의 발'이었지만... 뭐 어쨌거나 이제는 여름도, 장마도 다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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