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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꽃 Aug 19. 2024

세 부류의 사람들



서울 ○○동에 위치한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의 친구는 서울 외곽의 경기도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친구가 왕복 2시간의 버스 출퇴근을 감수한 것은 영화관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주어지는 간헐적 혜택 때문이었다. 영화관 마감 후에 상영을 앞둔 영화를 시범 상영하는데 아르바이트를 포함하여 영화관 직원들은 시범 상영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다. 주머니 사정이 변변치 않았던 대학생에게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공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그녀의 달콤한 유혹에 나도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르바이트생, 공채를 통해 정직원이 된 사원, 아르바이트에서 정직원이 사원.

우리 파트를 담당하던 직원은 아르바이트를 하다 정직원이 된 사원이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하는 동안 특유의 싹싹함과 성실함으로 직원들 사이에 좋은 인상을 남겼고, 그녀의 파트 팀장의 추천으로 전례 없는 특채 직원이 되었다.


그녀가 정직원이 된 이후에 아르바이트생이 된 나는 그녀를 대함에 특별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시절 그녀와 함께 일을 했던 아르바이트생들은 그녀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제까지 우리와 같은 소속이었던 그녀가 우리와는 다른 층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불편해했다. 그녀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그녀에게 달라진 호칭을 부르는 상황이 어색하다는 감정을 넘어 억울함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신분상승을 지켜보면서 자신들도 그녀와 같은 행운을 얻어 정직원으로 채용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는 듯하였다. 아르바이트생도 정직원도 아닌 특수계층(?)에 속한 그녀의 특별함은 아르바이트생들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올 때면 으레 그녀의 특별함에 대한 소개가 시작되었다.


“너 모르지? 주임 있잖아. 사실......”


정직원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위치는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들과는 다른 자리로 말이다. 아르바이트생 시절 그녀를 칭찬하던 직원들도 갑자기 같은 층에 소속되어 자신들과 같은 소속감을 가지게 된 그녀가 낯설고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느새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쳐 그녀의 싹싹함은 비굴한 아부로 그녀의 성실함은 탐욕스러운 야망으로 교체되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불편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제까지 같은 소속감을 가졌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이탈에 대한 배신감? 자신의 것이었을지도 모를 행운을 빼앗긴 억울함? 갑작스러운 그녀의 신분상승에 대한 질투?


그렇다면 그녀와 같은 신분이 된 정직원들의 불편함은 무엇 때문일까?

자신과는 다른 경로로 자신들과 같은 신분을 갖게 된 것에 대한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 자신들이 쏟은 시간과 노력의 가치가 그녀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과는 다른 신분이기에 베풀 수 있었던 자비로운 시선에 대한 후회?




임용준비를 하던 지인이 기간제 교사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들이 염치없음을 지적했다. 더불어 기간제 교사들이 정규직 전환이 된다면 임용인원이 현저히 줄 것이라며 불안한 마음도 함께 내비쳤다. 중등교사 임용시험 준비생으로 구성된 온라인 카페 ‘전국 중등 예비교사들의 외침’ 회원들은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 하면 안 된다며 집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정규직 전환을 외치는 기간제 교사들을 ‘교직계의 정유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교사가 아닌 예비교사인 그들이 왜 이렇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우리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당당히 정규직 교사가 되려는데 당신들은 본인 스스로 이 경쟁을 거부해 놓고는 언감생심 우리와 같은 열매를 나눠달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당신들과 같은 신분이 되어 내가 쏟은 노력과 에너지가 희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것은 같지만 그 가운데도 넘어올 수 없는 선을 그으며 그들 속에서도 서열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그대로 나의 밑에서 서있어 주길 바라는 것이었을까...


지인이 기간제 교사들의 몰염치를 이야기할 때,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규 절차를 거치고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이 똑같은 일을 해도 더 많은 돈을 받고, 고용의 안정성을 독차지하고, 위험한 일은 떠넘길 권리까지 함께 주어지는 것인가?

그 권리는 정당한 것일까?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을 둬서 채용을 하지 않을 순 없나?


무엇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계층화하고 폐쇄적이게 만든 것일까?

‘나’ 자신보다 나를 내가 다니는 회사, 내가 사는 집, 내 부모, 내 자식 등 나의 외부적인 것들로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상대를 외부적인 것을 넘어 상대의 존재 자체를 들여다볼 여유를 가질 수 없는 현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인생의 전반에서 늘 경쟁하고 또 절망하며 쌓아온 삶의 불안도 이유일 것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은 자기가 누구인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점수로 등수를 매겨 인식하게끔 가르쳐왔다”며 “시험을 보고 자기보다 점수가 낮은 사람이 있어야만 자존감이 형성되도록 배워왔으며, 정규직이 상위인 서열구조는 비정규직이 있어야만 존립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섬뜩하다.

그리고 점수가 아닌 석차를 보며 안도하고 절망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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