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국(가제)> 1장 초고

by Licht

1장: 비


7시 정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울려 퍼졌다. 비가 오는 날에는-비가 안 오는 날을 한 손에 꼽을 수 있지만-사이렌 소리가 젖어 유난히 축축한 느낌을 주곤 하는데, 이런 감촉은 일하러 나가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하는 법이다.

이 시간이 되면 각자의 작업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행렬이 흡사 먹이를 찾았다는 페로몬을 따라 줄지어 행군하는 거대한 개미 떼를 연상시키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감을 느끼게 한다. 식별 번호 B327 검정색 명찰을 달고 있는 민우는 이 출렁이는 인간 파도 속에서 북한산-W 작업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끝없이 내린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되다 못해 거의 뻘밭이 되어버린 진창을 철벅철벅 밟는 소리, 지친 이들의 한숨과 가래 끓는 기침 소리, 우비를 때리는 거친 빗방울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이따금 치안대의 호통과 명령도 들려오긴 했으나, 주위의 소음 때문인지 지겨운 익숙함 때문인지 민우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이 절망적 사단의 원인인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10월 이맘때쯤의 칼바람은 여간 차가운 것이 아니었는데, 민우는 해진 우비와 작업복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가 자신의 살을 갉아먹고 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추위에 머리가 멍해져 그저 기계적으로 행군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민우는 자신의 작업장에 도착했다. 곧이어 선전 확성기에서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과 노동요가 흘러나왔다.

“동지 여러분, 노동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신조선재건국의 번영을 위해 헌신하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위대하신 지도자, ooo 총통님 만세. •••늠름한 노동자들이여, 일어나라 힘차게 작렬하는 태양처럼•••. “

민우는 급하게 정제소로 향했다. 노동요가 끝날 때까지 노동자 정위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미친 허리 통증은 도저히 낫지를 않네. “

민우가 중얼거리며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옮겼다.

”맨날 이러고 앉아있는데 그게 나을 리가 있나. “

민우가 건넨 양동이를 잡으며 B321이 말했다. 민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음 양동이를 옮기러 갔다.


정제소는 가열부, 운반부, 처리부로 나뉘는데, 민우는 운반부에 속해있었다. 말 그대로 물을 옮긴다. 취수 지역에서 정제소로, 가열기에서 저장 탱크로•••. 물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이 작업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모든 작업이 다 그렇겠지만-허리 디스크가 생겨 작업 불능 상태로 분류되어 ‘처분’되는 노동자가 한둘이 아닌 것이다. 민우 같이 선천적으로 허리가 좋은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버티기 힘든 곳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정제소는 정말 음산하다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장소다. 커다란 통짜 콘크리트 건물인데, 외벽이 온통 담쟁이덩굴로 덮여있어 겉으로 봐선 이 건물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절대 알 수 없다. 내부는 지속적인 강우로 비가 새서 곰팡이와 물때가 연못 속 개구리알 같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에 어울리게, 곧곧에 ‘노동은 생존이다’, ‘총통님께서 보고 계신다, 총통님께서는 보호하신다.‘ 따위의 문구가 적혀 있는 선전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몇몇 포스터는 이미 물에 심하게 젖어 거의 죽이 되어버려 내용을 알아볼 수도 없다. 어두침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5년째 일하고 있는 민우도 익숙해지기 어렵다고 느끼게 했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민우는 단백질 바를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식감이 영 좋지 않고 매우 딱딱한 간편식으로, F구역의 양식소에서 길러낸 지네와 풍뎅이 애벌레 등을 으깨서 압축하고 달달한 감미료를 넣어 대량으로 제조, 배급하는 음식이다. 식감이 좀 끔찍하다 뿐이지 쓴 맛과 단 맛이 나름 적당히 잘 어우러져 맛이 나쁘지 않고 노동을 위한 열량이 충분히 들어가 있어 식사 시간만을 기다리는 노동자가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던 중, 정제소 작업반장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운반부 동지들, 지금 하고 있던 식사 빨리 마치고 5분 안에 바로 집합! 취수 구역으로 간다.”

이 간단하기 짝이 없는 명령 뒤에, 주위의 공기는 끔찍한 불안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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