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00001의 경계에서 나는 다시 시작했다.
삶과 죽음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내가 마주한 그 경계는 정밀한 측정기조차 잡아내지 못할 0.00000001의 틈이었다.
그 찰나의 임계점 앞에 서자 평생을 매달려온 내 인생의 장부 항목들이 순식간에 무의미해졌다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명품 가방은 그저 질긴 가죽 뭉치로 변하여 감액되었고 통장의 숫자는 태울 수도 없는 디지털 부채처럼 느껴졌다. 그 모든 가공의 자산들을 털어내고 나니...
장부의 맨 마지막 줄에는 오직 "나라는 실체" 하나만이 남았다.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숫자들이 떠 있었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미래를 약속하는 기호처럼 보이지 않았다.
또한 평소와 다르게 숨이 깊게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내 삶의 전원을 잠시 꺼버린 듯....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은 삶이 아닌 장부의 숫자였다는 것을...
지난 14년의 사투와 처절한 번아웃은 사실 내 삶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가짜 자산’들을 강제로 상각 처리하는 과정이었다.
타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혹은 내일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자산이라 우기며 계상했던 것들이 이제는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성과, 직함, 비교, 체면.... 그외 모든 환경들
나는 그것들을 자산으로 분류해 장부에 올려두었지만, 실은 감가상각조차 되지 않는 허상이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지독한 허탈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거품이 제거되고 가장 순수한 나로 돌아온 영점의 상태다.
장부상의 수치가 0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나의 가치를 다시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0은 공허하다고, 아니다 0은 공허가 아니라 기준점이다.
우리는 왜 그토록 오늘을 허기지게 살았을까?..
우리 마음속 미래의 수익이라는 불확실한 채권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의 집과 차, 그리고 명품가방을 위해 우리는 정작 가장 확실한 자산인 오늘 나의 목숨을 담보 잡혀왔다.
나는 이제 인생의 회계 기준을 바꾸기로 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 당겨와 오늘을 빚쟁이로 만드는 발생주의대신,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쥐어진 살아있음을 만끽하는현금주의로 살기로 했다. 이제는 미래의 수익을 위해 오늘의 나를 손상차손 처리하지 않겠다.
지금 이 시원한 공기,
목마를 때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온한 밤,
나를 믿어주는 단 한명의 사람...
이것들이 내가 즉시 가용할 수 있는 최고의 현금 자산이다.
설날 아침, 소란했던 불꽃놀이가 끝나고 찾아온 고요 속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밖은 조용했고, 내 안도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그 고요함은 내게 묻는다.
무엇이 진짜 부(富)인가?
외부의 조건인 집, 옷, 가방에 휘둘리지 않고도 평온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거대한 내면의 자본이 확충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다 필요 없다”고 장부를 비워낸 순간, 세상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주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가방을 채워주기 위해 소모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통찰로 전환하는 기록자가 되려 한다. 그것이 내가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인생 장부가 누더기가 되어 폐기를 고민하는 이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장부가 '0'이 되었다면, 그것은 파산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독립의 시작이라고.
나는 지금도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기준 앞에 서면 인생의 모든 복잡한 함수는 사라지고 어떤 상황 앞에서도 오직 본질만이 남는 엄중한 상태가 된다. 죽은 앞에서는 그 어떤 증거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정말 한 끗 차이다. 고작 0.000001이라는 찰나의 틈.
하지만 그 찰나를 넘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수만 가지 번민도, 집착도, 증명하고 싶었던 욕구도 사실은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어진다는 것을.
죽음 앞에서 비로소 모든 계정 과목은 삭제되고 장부는 백지가 된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나의 영점을 마주하기로 했다. 영점은 끝이 아니라, 모든 가공의 숫자가 소멸된 뒤에야 드러나는 가장 정직한 새로운 기준선이다.
0.000001의 경계를 넘어 다시 삶으로 돌아온 당신에게 질문을 하자면...
무엇을 위해 다시 그 무거운 장부를 지고 가려 하는가?..
이제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기대가 가득했던 썩은 장부는 던져버려라.
죽음의 문턱에서 보았던 그 단순함으로 이제 당신의 손으로 오직 나만을 위한 인생장부를 다시 써 내려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