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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e Y Apr 09. 2021

실은, 극성맘도 편치 않다

가정 어린이집 3년 차, 여전히 적응 중

가정 어린이집은 규모가 작다. 

만 0세(2세), 만 1세(3세), 만 2세반(4세)반이 원에 따라 한, 두반으로 이뤄져있다. 간혹 0세반이 없는 원이 있고 4세반이 없는 원도 있다. 우리 아이는 만 10개월 때 0세반에 들어갔다. 나름 사정이 있긴했지만 사실 10개월 산 아이가 어린이집에 보내는 건 쉽지 않다.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모진 경험이다. 0세반 때는 일주일 꼬박 다닌 적이 없고 하루에 1시간, 한 달에 10시간 채우는 수준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간 탓에 의도치않게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그런 아이를 적응한다는 명목으로 매일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점 '전전긍긍맘'으로 '보여지는 것 같았다'. 


적응을 위해 보내셔야 한다는 선생님의 조언, 그럴 거면 어린이집에 등록하는 게 의미없다는 주변에 조언에도 일단 계속 법적 등원 일수를 채우며 다녔다. 소위 맘카페에서 좋은 평이 자자한 어린이집도 아니고 최신 공기청정기, 신식 매트 등 시설이 화려한 어린이집도 아니었다. (사실 그런 어린이집에서도 상담을 받아봤다.) 단지 몇 번의 통화, 몇 번의 마주침으로 알게 된 원장님에게 풍기는 모습이 우리 가정과 잘 맞을 것 같이 보였다. 내 아이를 세심하게 봐줄 것 같은 믿음이라고 해두자. 


처음부터 등원 일수만 채우는 '예민맘', '전전긍긍맘'이 된 듯한 느낌 탓도 있었고 실제로 아쉬운 말 할한 상황이 크게 발생한 것도 아니었고 더구나 내 아이를 맡겼는데 아쉬운 말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수족구 3번, 돌 발진 1번, 코 줄줄 코 감기, 목 감기, 알러지 등등을 다 겪고 만 1세, 즉 3세가 되었고 난 번역을 해야 했다. 무조건 외향적 기질이 아닌 아이라 월화수 엄청나게 울고 들어가 목금은 웃으며 등원하며 잘 다니다 코로나가 터졌다.


별 일 아닌 지난 과거를 회상하느라 세 문단이나 쓰다니. 

아무튼 4세반이 되었고 선생님이 바뀌었다. 우리나라 나이로 말이 4세지 아직 30개월 살았을 뿐이다. 동일 개월 수 아이들에 비해 말을 좀 더 잘할 뿐이지 그냥 30개월 아기다. 원장님이 뿜뿜 풍기는 분위기처럼 최고 언니반의 선생님 또한 최고다. 8명이나 되는 아이를 정말 하나씩 세심하게 봐주시고 유치원 가기 전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이 시기가 중요하다고 습관도 바로잡아 주시려고 노력하신다. 가정에서는 어떻게 생활하는지 어떤 기질인지도 파악하려 하시고 제안도 해주시고 공감도 해주신다.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지만 마음으로 우러나게 감사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굴에 '작은' 상처가 났다. 하지만 일시적인 게 아닌 3세반때부터 고민해왔던 부분이고 전 담임선생님께 한 차례 말씀드렸던 탓에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밤새 고민했다. 지금까지 먼저 상담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별일 아닌 일로 내 아이에게 해가 가는 치맛바람을 불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상대 아이의 엄마와 친분이 있어서 우리 아이만 생각한 내 행동이 향후 다시 내 아이를 보는 차가운 눈초리로 돌아올까봐 두려웠다.


남편은 가슴이 내려앉아 퇴근 시간 전에 회사를 나와 한걸음 집으로 달려왔고 원을 옮길 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작지만 트러블을 겪고 나니 맘카페에 올라오는 소소한 고민글이 생각났다. 여러 댓글이 달렸던 그 글들의 주인공처럼 막상 당사자가 되니, 망설이는 나는 마치 아이를 지키지 못하는 엄마가 되어 버렸다. 번역을 그만둬야된다는 생각까지 했다. 모든 게 아이를 위한 건데 아이를 지키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마음 한켠으로는 쉽지 않아서 속상했다. 지인들은 말했다. 내 아이를 위한 게 우선이고 내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들한테 보이는 시선을 두려워하는 게 비겁하다고. 직장 어린이집에서는 퇴소감이라고. 단순히 그런 심경은 아니었지만 따지고보면 그럴 지도 모른다. 나는 축축한 나무가 뒤엉켜 헝클어진 정글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심정이었다. 


일단 원을 옮기든 이사를 가든 모든 극단적인 방안을 뒤로 밀고 선생님께 상담 요청을 했고 아이를 원에 보내지 않았다. 선생님도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남보다는 내 아이'라는 구호를 마음 속에 외치면서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들어갔다. 첫 상담 요청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걱정과 달리 앉기도 전에 난 말을 시작했고, 말을 정말 많이 했다. 돌이켜보면 쓸데없는 이야기도 한 것 같다. 물론 '더 세심하게 볼게요'라는 말이 돌아올 테지만 나도 모르게 열심히 이야기했다. 담임 선생님도 '더 세심하게 볼게요'에 추가해서 앞으로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지도 방법을 제시하셨다. 전문가는 다르긴 다르다. 


일단락되었고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집에 온 후 한참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난 예민맘에 이어 극성맘이 되었구나. 누구나 극성맘이 되길 원하진 않지만 내 아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선생님, 상대 아이 부모가 불편해할 걸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이번 일은 대화로 풀었지만 다른 부모였으면 노발대발 더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또 물러터진 게 아닌가 내 아이도 못지키는 엄만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금도 품고 있다. 너무 어렵고 한숨만 나온다.


사회 생활을 하기 전에는 특정 대상을 싫어하거나 내가 누군가의 타겟이 되거나 하는 일이 없이 무난했던 것 같다. 물론 요즘은 학교폭력이 심해져 라떼 이야기 일 수 있다. 육아를 하면 정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니 내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비치는 지 투명 막처럼 잘 보인다. 하지만 내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지키고 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하고 쌩쌩 칼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고 버텨야 한다.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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