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날 나는 사명감이 그득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인들 대부분이 그렇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돈을 받는 만큼 일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고 누군가의 어려움을 지나치고 애써 외면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돈'이라는 성공을 추구하던 대표는 사명 넘치는 직원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연말 통보받는 연봉 상승률은 동료들 중 가히 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력 끝에 업계 전문가만 모인다는 꽤 멋진 모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대기업에서 줄줄이 후배들을 꾀어온 임원급 인사는 그 라인에 속하지 않은 나를 어리석은 모래알 정도로 본 것 같다. 동료들이나 인턴들은 '업'을 대하는 태도를 높게 사는 듯 보였고 늘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인지 출산과 동시에 회사원의 타이틀을 버린 나를 보며 안타까운 듯 꽤 오랜 시간 함께 일하자며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집에서 프리랜서 해서 얼마나 번다고'라는 시선에 밝은 웃음으로 화답하며 정말 내 능력조차 땅속으로 나가떨어진 기분을 프로페셔널하게 감추어왔다. (그런데, 프리랜서가 쥐뿔 벌지 못한다는 건 직장인의 선입견일 뿐이다.)
나는 꽤 단단해졌다. 그런데도 몸살의 횟수가 늘어나고 링거를 맞아도 점점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출산을 하면서 한 해에 두 번 정도 몸살을 겪었다. 육아를 해야 하기에 조금만 으스스해도 링거를 맞으면 저녁이면 멀쩡해진다. 이제는 몸이 지쳤나 의심할 정도로 고영양 링거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웹툰이고 드라마 숏츠고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섭렵했다. 직장 생활이 나오는 웹툰, 영화는 외면하고 있었다. 부러워서. 최선을 다해 몰두하고 즐겁고 싶어서.
물론 요즘 트렌드인 라라밸(라이프 라이프 밸런스)와는 상반된 삶이었다. 과연 어리석은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최선을 다해 살았던 과거는 결과 중심적 사고에 익숙하게 되고 가정이 중요해지는 시점이 왔을 때 그 허무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육아는 결과가 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내연애 사절>, <이섭의 연애 웹툰>을 보면서 여주인공에게서 스무 시절 내 모습을 보았다. 지난주 끝자락에 6년 만에 만난 동아리 친구들에게서 대기업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했던 지인들의 이야기. 대학연합광고동아리이기에 전국 어딜 가나 잘나가는 회사라고 한다면 잘나가는 그들이 열댓 명은 있다. 육아도, 가정도, 직장도, 직업도 멋지게 지키며 사는 지인들의 이야기들. 그들 대비 나의 육아는 핑계일 뿐이었다.
바로 그 직전인 지난주 첫 자락에는 아이의 뭐 검사(지능 검사 비슷한 건데 어쩌다 하게 되었다)를 했는데 결과 상담에서 내가 들은 첫 말은, 나의 인생에서 1순위는 아이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을 제쳐두고 시간을 내 들은 그 말로 조용히 가슴에 박혀 엄마도 아닌, 나 자신도 아닌 현재의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이런 경험 뒤에도 짬 내서 문학이고 비문학이고 할 것없이 읽으며 진정 하고픈 일들은 떠올렸고 나도 모르게 뇌 스위치를 반짝반짝 키는 나 자신이 어처구니없고 우스웠다.
요즘은 번역이 아닌 지난 10년 나의 영역이었던 '홍보' 일을 한다. 솔직히 전략적인 차원에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간단한 콘텐츠 기획, 제작만 하면 될 줄 알고 시작했다. 대표는 시스템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더군다나 페이도 맞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전략적인 부분을 요구한다.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오프라인 미팅에 들어가면 나조차도 열심히 하고 싶어 짱구를 굴리고 있다. 회의가 끝나면 다시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니야, 나는 엄마잖아. 능력이 없어 보일지언정 모른 척하도록 노력해야 해.'
아마 내 안의 사명감을 저버리고 내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기에, 몸에서 반응했나 보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드러누움. 그래도 나는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 좋다. 사명감을 품고 사는 내가 좋다. 일이든 생활이든 뭐든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소신이 있고 가치를 아는 사람이 좋다. 먼 훗날 언젠가는, 어린 시절 무턱대고 젊음을 갈아 넣는 직원을 안타깝게 보던 대표와, 기업 가치에 자신의 이름을 동일시하셨던 그들과도 마주치는 꿈을 꾼다. 사람이 가는 길, 틀리고 맞고는 없지만 심지대로 실행하진 못하였어도 다른 가치를 만들며 사는 삶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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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에는 청소를 하며 본 세바시 - 김정은 편 영상을 보고 펑펑 울었다. 청소를 할 땐 음악보다는 세바시나 교육 영상을 틀어놓곤 한다. 연예인 편은 기대하지 않았고 큰 관심도 주지 않았기에 어쩌다 연속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틀어졌다. 하니의 세바시 영상,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