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계속 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브런치에 쓰든 스레드에 쓰든 계속 쓰고 있습니다. 짧은 단상부터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아 두고 메모장에 옮기고, 스레드에도 올리고. 그 조각을 모아 브런치에 썼지요. 브런치 글을 또 모아 긴 시리즈를 완성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의 세상은 조금 더 명료해졌어요. 힘들고 고단한 일이 있어도 글을 썼어요. 쓰다 보면 마음이 삭혀졌죠.
처음부터 그랬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누가 날 칭찬해 주길 바라서 쓰기 시작했어요. 사회적 인정을 받아본 지 너무 오래되었거든요. 칭찬은 달콤했어요. 사실 쓰면서 정말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괴로운 기억을 활자화해서 남겨두는 게 도움이 될까 싶을 때도 있었죠. 누가 내 글을 읽어주지 않으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누가 읽어줄까? 심지어 재미도 없는 ‘자폐아이와의 삶 ’에 대한 이야기죠. 불안했어요. 머릿속에 엉킨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글도 더듬거리듯 썼으면서도 조급했어요. 글 보다 반응을 더 기대했어요. 고통스러운 것보단 달달한 것만 찾았죠.
그러나 정원이에 대한 이야기는 제 스스로 다짐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내려둘 것은 내려두고, 용서할 것은 용서했습니다. 지난 1년간 얻은 가장 값진 선물이었죠. 쓰기 시작하면서 뒤엉켜 있던 감정이 들쑥날쑥해지기도 했어요. 아이와의 삶은 현재진행형이거든요. 아직도 쓰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썼지만, 모든 것을 쓰진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정원이 아빠 이야기는 거의 쓰지 않았어요. 정원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는 초점이 흐려질까 두려웠어요. 같이 사는 사람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싶지 않았죠. 그의 이야기는 제 몫이 아닙니다. 그의 몫으로 남겨둘 겁니다. 그 외에 타자에 대한 이야기는 늘 조심스러워 둥글게 깎고 다듬다 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흐릿한 글이 되기도 했죠.
고백하자면, 글에 쓰인 현실은 더 뒤죽박죽인 데다가 훨씬 다이내믹합니다. 인생은 풍경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죠. 순간순간 믿어지지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아마 모든 일을 다 공개할 순 없을 거예요. 다만, 저에 대해서만큼은 정직하게 스스로의 약한 면을 가감 없이 쓰고 있습니다. 마치 술 한 잔 쭉 들이켜듯요.
전 정원이 일곱 살부터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술 다음 날 아프면 아이를 돌보는 게 어려웠으니까요. 무릎이 아파서 달리면서라도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어려웠어요. 삼키지도 풀지도 못하는 마음은 그저 꾹꾹 눌러 담아만 두었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도 흩어지고 나면 외로웠어요.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눠도 각자의 삶이 있었습니다. 옛 친구들은 제 삶을 경험해보지 못해 이해하지 못한 채, 대단한 엄마라 했죠. 자폐아이를 키우는 지인들은 아프면서까지 글을 쓰는 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이에게 더 집중하라는 거죠. 그래서 고독해졌어요. 수다는 수다로 끝났어요. 어디에서도 마음 붙이고 정착할 곳이 없었습니다. 아, 집에서는 제가 아이의 의지처라 제외하고요. 팀이잖아요.
겨우 발견한 곳이 바로 글입니다. 지금 이 글은 주절주절 술 마시듯 써봅니다. 옛 연인에게 고백하듯 소중한 것은 너, 글이라며요. 1년간 저는 잘 털어냈고 또 잘 매듭지은 거 같아요. 또 계속 쓸 용기를 얻었어요. 줄곧 찾았던 작은 온기는 그 용기에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누굴 만나도 무슨 일을 해도 저는 추웠거든요. 정원이와 살면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찾은 거 같아요. 서툴러도 완벽하지 않아도 저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 저는 그래서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한 잔에 말하고자 하는 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쓰고 싶은 마음까지 담으려 합니다. ‘나’라는 단 한 명의 독자는 계속 읽어줄 테니까요. 언젠가 바텐더처럼 술 한 잔 기울일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