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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정원사 Nov 22. 2024

산다는 것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아

네 번의 발작, 세 개의 진단 그리고 하나의 장애


괜찮아.
산다는 건 그저 고비고비 사이의
순간의 행복을 누리는 거야



발작, 늘 갑작스럽고 날카롭게 찾아오는.


덜그덕. 덜그덕.

그날은 월요일 아침 8시였다. 거실에서 옹기종기 모여 자던걸 좋아하는 아이 때문에 옆에서 늘 새우잠을 자야 했다. ‘아 아침이네, 유치원 가야지. 드디어 월요일이구나.’ 졸린 눈을 부비며 잠을 깰 듯 말듯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티비장의 손잡이에 발을 부딪히는 소리였는데 평소랑 조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서늘한 느낌에 잠이 확 깨어 아이를 보았다.


 2021년 5월의 아침. 아이의 첫 발작은 시작됐다. 곤히 잠들었던 아이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입술이 보라색이 됐다. 거품이 조금 흘러나오고 몸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은 흔들림은 손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본능적으로 다치지 않게 주변을 치웠다. 영겁의 시간이 지나는 것만 같았는데. 고작 2분이 지났다니. 어떻게 해야 하지? 당황하는 마음에 119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는 지인이 의사라 카톡으로 물어보니, 일단 응급실로 가란다. 첫 경련이니까. 위험군인 발달장애니까. 남편이 119에 전화하고 난 깊이 잠든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듯함으로 생존을 확인했다.


아, 살아있구나. 다행이야.


119 상담원은 깨어나면 인지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을 하란다. 발작을 하는 동안, 뇌에 산소공급이 안되기 때문이라며. 아, 이 아이는 말을 못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 괜찮은 건가 싶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아이를 조심스레 깨웠다. 그리고 아이가 제대로 반응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짠하고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말을 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막막하고 망연해서 눈물이 났다. 응급실로 가는 구급차에서 아직 의식이 반쯤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고 00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서 채혈하고 응급뇌 MRI를 찍었다. 당시 지금보다 발달이 더 느렸던 아이는 상황이해가 어려워서 온몸으로 검사와 채혈을 저항했다.


 사람이 너무 힘든 상황이 닥치면 오히려 담담해 지나보다. 당장 이 일을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이겠지. 어머니니까 무너질 수 없잖아. 두 팔에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아이를 잡았다. 진정제를 먹였지만 진정이 잘 안 돼 결국엔 주사로 약물이 흘러들어 갔다. 코로나 시기였기에 보호자는 한 명만 허락됐다. 그 대학병원에서 두 돌 때 언어검사를 했었기에 다행히도 차트가 있었다. 아이는 발달지연 위험군에 있었기에 첫 발작임에도 뇌 MRI를 긴급으로 찍을 수 있었다. 예약이 힘든 뇌파검사는 재우는 게 힘든 탓에 두 번의 실패 끝에 하고 나서야 아이의 뇌파에 경기파는 없다는 이야길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인 건가. 경기파는 없다니 10년간 재발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는 거라고 의사는 위로해 주었다.



장애등록은 그저 이정표에 불과하지.

그해 가을. 장애등록 신청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유명하다는 소아정신과 교수는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중증자폐"란 진단을 보자마자 내렸다. 희망을 갖고 재활수업에 라이딩에 목매던 3년의 결과가 이거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유명 교수는 ”이 정도의 중증임에도 문제행동이 많지 않은건 부모님이 애쓰시고 조기재활에 힘쓴 덕분이라고“ 날 위로했다.

 교수가 준 장애등록 심사용 진단서에는 자폐성장애 1급에 준하는 GAS점수 10점이 기록되어 있다. 중증 자폐란 지적 동반을 의미한다. 사실 병원에서 밀봉으로 받는데, 주민센터에 제출 전 담당 공무원이 내용을 살짝 보여줘서 확인할 수 있었다. 10점. 그것이 만5세 장애등록용 진단서에 기록된 점수였다. 심사 후, 난 장애등록 결정서를 받았다. <구 2급에 준한다>. 그리고 서류와 사진을 들고 주민센터를 방문하여 복지카드를 신청하고 나서야, 하늘색 복지카드와 장애인주차증을 받을 수 있었다. 웃는 아이얼굴의 뒷면에는 자폐성장애 심한 장애라 적혀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생긴 신분증이었다. 슬프지만 담담했고, 그저 앞으로 해야 할 것만 생각하던 가을이었다. 장애등록을 했다고, 자라지 않는건 아니니까.


산 넘어 산을 넘었는데, 또 산이 있네.

그러나 2022년 7월. 두 번째 발작을 했다. 장마철 월요일 아침 8시였다. 그날은 비가 몹시도 많이 내렸다. 우린 동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다행히 구급차에서 구급대원이 알려준 대로 처치할 수 있었다. 14개월 만의 재발. 굳이 응급실로 가서 고생시키지 말란 의사의 조언을 기억하고 외래를 예약했다. 그리고 항경련제 복용을 시작했다.

2023년 10월, 일요일 아침 세 번째 발작을 했다. 15개월 만이었다. 그저 그 2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괜히 잠든 남편을 깨우진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 상처인데 혼자 감당하기로 했다. 다치지 않게 주변을 살피고 영상을 찍었다. 영상을 찍는 이유는 외래에서 영상을 보여주어야 파악이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엄마를 확인할 수 있도록 그저 옆에 지키고만 있었다.


괜찮아, 아가.
엄마가 옆에 있어.
걱정 마렴.

눈을 감으면 선명한 그 장면은 핸드폰 영상으로도 늘 갖고 있다.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면 설명할 수 있도록. "세 번 다 아침잠을 깨기 전 조금 서늘한 상태에서 발생했어요. 시간은 대략 2분 이내였고, 직후에 깊은 잠에 빠졌어요. 아이가 무발화 자폐라 언어로 이상을 확인할 수 없지만 간단한 행동지시는 따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래도 괜찮을 거야. 세 번이었지만 간격은 점점 멀어지잖아. 정말 다행이야. 두 번째 뇌파검사에서도 경기 파는 없다니 컨디션 관리만 잘하면 될 거야.' 자폐성장애에 경련까지 관리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발작하면 어쩌나 싶어 뜬눈으로 옆을 지키는 밤이 계속됐지만.



시련 뒤에 또 시련이 온다고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고작 3개월 만이었다. 그날은 잠들지 않은 아이를 운동장 한 바퀴 혼내면서 돌고 온 시리도록 추운 2024년 1월의 아침이었다. 네 번째는 혼내고 나서 지친 마음에 안방에 숨어버린 나를 대신하여 남편이 목격했다. 아, 이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아이를 아프게 해서 몸으로 그 고통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내내 같이 아팠다. 3개월 만의 재발로 인하여 소아정신과 말고 소아신경과도 정기적으로 다니게 됐다. 아이의 성장에 오롯이 집중하며 살던 내게 이건 정말 견디기 힘든 무게였다.


살아야 해, 정신 차려.


 하지만 때때로 무너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서로를 할퀴는 듯한 아픈 시간들이 이어졌다.  2024년 2월. 아이가 갑자기 걷지 못했다. 시련 뒤에 꼭 좋은 일만 오는 건 아닌가 보다. 하늘이시여, 설마 영영 걷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간단한 의도 표현도 어려운 아이에게 이런 시련은 너무 가혹하잖아요. 아이는 절뚝이며 밥솥에 가서 밥을 달라고 하며 울었다. 걷지 못하고 절뚝이는 고통의 시간이 한 달 반동안 이어졌다.

세 군데 병원을 가도 딱히 원인은 없었다. 어느 한 곳ㅡ소아정형외과라 이름붙여진ㅡ에서는 우리병원은 이런애 검사가 힘들다고 했다. 무너졌다. 이런 애? 장애를 가지고 협조가 어려우면 어린이가 아니란 말인가? 일반적인 고관절활액막염 양상도 아니란다. 왼쪽을 절다가 오른쪽을 절뚝였다. 결국 소아류머티즘일까 싶어 서울의 큰 병원을 알아보는 순간 갑자기 걷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야. 그저 모니터링하면서 지켜보면 돼. 그래도 당장 닥친 문제는 아니잖아. 아이가 다시, 걷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 예쁘게 웃고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합니다.”

 모진 시간들 중에 가장 날카로왔던 순간들은 인생의 변곡점마다 있다. 아직 그 시간들의 위에 나는 서 있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어서 예민했던 어제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사랑하며 감사한 오늘을 보내고 있다. 고비고비 사이에 따듯하고 고마운 '오늘'들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

 내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의 따스함을 사랑한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아프게도 하지만 엄마에게 사랑해하고 말해주는 예쁜 미소를 사랑한다. '마'하고 입을 오물거리며 불러주는 순간을 사랑한다.


 또 시련이 오리라. 또 무너질 날이 오면, 작은 도피처에 숨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괜찮다. 여정 위에 작은 손을 잡고 따듯한 그늘 안에 잠시 쉬어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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