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들의 권력
우리의 역할들은 각각 권력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역할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에 가깝다. 우리가 '사회적 역할'에 가장 큰 권력을 부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밖의 역할들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를 '사회적 역할'이 충당해 오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사회적 역할'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큰 무기인 재화로 다른 역할들을 겁박한다.
'오늘 급한 요청이 와서 저녁 약속 취소해야 할 거 같아'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전화도 자주 못했네요'
히지만 겁박하기만 하면 다른 역할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애매해진다. 그래서 '사회적 역할'은 다른 역할들에게 재화라는 무기를 공급한다.
'정말 미안해, 대신에 이번 주말에 맛있는 거 사줄게'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이번 설날에 사갈게요'
다른 역할들은 '사회적 역할'이 너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기에 이 역할을 마냥 고깝게 여길 수는 없다. 단지 '그래도... 나한테 조금 더 권력을 줄 수 있잖아?'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이러다 역할들의 갈등이 심해져 냉전 시기가 오면, 역할들의 관리자인 '나로서의 역할'은 고민에 빠진다. '얘들을 사이좋게 지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적 역할'의 권력을 줄여? 그러면 다른 역할들에게 줄 무기가 없어지는데...'
'자녀로서의 역할'의 권력을 줄여? 자식이라곤 나 하난데... 엄빠가 섭섭해하시지 않을까...'
'친구로서의 역할'의 권력을 줄여? 아냐... 이번 약속도 깨면 손절이야 엉엉엉'
'연인으로서의 역할'의 권력을 줄여? 아 맞다 없구나. 오케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할 중에 중요하지 않은 역할은 단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다. 그러면 '나로서의 역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해보았고, 답이 없는 문제이지만 방향성에 대한 결론은 잡았다.
결국 조르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