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Part.01

살아남는 것

by 유민재

이전 글에서 광고 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광고인의 포지션은 스토리텔러가 될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진정성, 인간적인, 공감'


당연함을 넘어 진부하다고 느낄 정도의 단어 조합이다. 그렇지만 이 키워드를 잃어버린 광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지금 말하는 '살아남는다'는 단순히 당장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다. 미래에도 이 세상에 영원하다는 뜻의 '살아남는다'이다. 실제로 내가 죽더라도.


나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그 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요새는 과학 기술 때문에 170살까지 강제로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다니긴 한다)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처럼, 노욕(老慾)이라고 생각한다. 갈 때가 됨을 알면, 나 스스로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후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신께 구원을 바라지 않고)

그렇지만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고 싶다.




내 기억 상 다른 또래들보다 직업적인 꿈이 많았다.


첫 번째 꿈은 건축가였다. 아파트에 살 때 부모님의 '살살 걸어라'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내 집인데 왜 조심해서 다녀야 되는 거야'라는 마음이었달까. 내 집 바닥이 남의 집 천장이고, 내 집 천장이 남의 집 바닥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일까, 어렸을 때 단독주택에 대한 로망이 굉장히 컸다.(이 꿈은 아직 진행 중이다) 마당 있는 2층 집. 개를 여러 마리 키우는. 그런 집을 상상하면서 건축책을 봤다. 당시에 땅콩집이라는 형태가 유행해서 크지는 않지만 작은 마당이 있고 3층 정도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런 집을 꿈꿨다. 용적률, 건폐율, LDK 같은 용어들을 그때 배웠다. 그렇지만 수학의 벽에 부딪혔고 다른 꿈을 찾아 나섰다.


두 번째 꿈은 작가였다. 중2병 시절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학교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미친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등교할 때 책을 읽었다. 수업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점심시간에는 밥 먹고 바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저녁에 집에 가서 책을 읽었다. 겉 멋이 들어서 학교에서는 칸트, 단테, 장 자크 루소의 책을 읽고 (읽었다기 보단 훑은 거였지만) 집에서는 인문학, 소설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한 꿈이 생겼다. 이야기를 만들고 싶고, 내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끄적거리곤 했지만 제대로 완성한 적은 없었다. (이 꿈 또한 아직 유효하다)


세 번째 꿈은 축구 기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너무 좋아했었다. 그러면 보통 축구선수를 꿈꾸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실력을 정확히 파악했으니깐. 그래서 축구를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했고, 매주 새벽에 일어나 EPL과 챔피언스리그를 봤다. 졸린 눈을 비비며 축구를 보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일어나서 볼 텐데, 돈 벌면서 보면 일석이조 아닌가?"라는 마음으로 축구 해설 위원이라는 꿈을 가졌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축구 기자라는 꿈을 가졌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아닐 수도 있지만) 기자 출신 해설 위원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원대한 꿈을 가졌었다. "스포츠 기자가 된 다음에, 영국으로 가서,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출입 기자가 되고, 인지도를 쌓은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해설 위원을 해야겠다"


이 꿈은 꽤 오래갔다. 중학교 3학년 때 쯔음부터 대학교 2학년 때까지니 군대 기간을 합치면 거의 7년 정도이다. 기자가 되기 위해서 언론영상을 전공했고, 언론 강의 커리큘럼을 밟으며 기자가 될 준비를 했다.

그렇지만 이 꿈은 전역 후에 점점 불씨를 잃었다. 그 시발점은 잘 모르겠다. 문득 축구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예전에는 밤을 새워서 보던 축구가 별 재미가 없더라. 이런 감정이 느껴지니 당황스러웠다. "기자 하려고 언론 전공 했는데. 나 이제 뭐 하지" 그렇게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고민을 했다. "뭐라도 하나 해야 될 텐데...." 그러다 생각난 것이 복수전공이었고 몇번 수업을 들어봤던, 같은 학부인 광고홍보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별 고민 없이.


그렇게 그냥 시작한 광고는 별천지였다. 강의도 재밌고, 내가 기획을 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PT를 하고, 좋은 평을 듣는 것이 엄청난 도파민이었다. (반쯤 진심으로 그때가 내 리즈시절이라고 얘기하고 다니곤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광고인에 대한 꿈이 생기던 4학년 1학기. 프레젠테이션 강의에서 자기 판매 기획서를 만들어서 PT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집에서 PPT를 만들면서 생각을 해보았다. "난 어떤 광고인이 되고 싶은가?" 이 물음의 답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로 돌아가게 됐다. 내가 가졌던 꿈들의 공통점을 생각하면서.



건축가, 작가, 기자, 축구 해설 위원



건축을 하면 건물이 남는다.

(가우디와 승효상과 안도 타다오를 본다)


작가를 하면 작품이 남는다.

(김훈과 카잔차키스와 박웅현을 본다)


기자를 하면, 축구 해설을 하면 경기의 감정이 남는다.

(이성모와 장지현과 임형철을 본다)


내가 가졌던 꿈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남기는 것임을 그때 깨달았다.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영원히 살아남는 무언가를.







그 마음을 깨달은 후, PT를 했고 광고인을 내 첫 번째 업(業)으로 정했다.





웰콤이 한창 잘 나갈 때 쓰던 템플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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