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의 맛좋은 한 접시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처는 동네 대형 마트 계정.
점심쯤 집 앞에 도착하도록 전날 미리 원격 장보기를 해놓은 터라, 슬슬 배송이 출발한다는 반가운 내용일 줄로 알고 열어 보았다가 그만 육성으로 성질을 내고 말았다.
외식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매일 저녁 무언가 하나씩은 요리를 만들어 내야 하지만, 장본 당일 가장 신선한 재료로 만드는 바로 그 날의 저녁 메뉴는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오늘 배송을 받으면, 두툼한 통삼겹살 한 근으로 수육을 해 먹을 생각이었다. 마침 똑 떨어진 된장도, 무말랭이 한 봉지도 모두 그 한 끼를 위해 장바구니에 담은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고기가 품절되어 그것만 계좌로 환불해 주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젯밤 주문 버튼을 누른 직후부터 내 머릿속엔 오늘 저녁 먹을 기름기 자르르한 수육 생각뿐이었다. 마트의 사정이 내 소중한 식사 계획을 망치게 둘 수야 없지. 한파를 뚫고 동네 반대편 전통시장으로 가서, 정육점에서 삼겹살 한 근을 기어이 끊어오고 말았다.
수육이라 하면 보통은 이름답게 물에 넣어 삶는 고기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소위 '무수분 수육'. 냄비에 수분이 많은 과채를 가득 넣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려 약불에 두면, 물을 따로 넣지 않아도 재료에서 수분이 스며나와 끓고, 그 끓는 증기에 고기가 쪄지는 요리법이다. 육즙 손실이 적어 쫀득하니 맛있다는데,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분석은 해보지 않았지만.. 아무튼 신기하고 재밌고 맛있으니 딱히 안 해볼 이유도 없었다.
양파 두 개를 집어다 껍질을 까고 굵게 채를 쳤다. 두 알이어도 산 지 꽤 오래된 양파라 겉 부분이 물러서, 멀쩡한 부분만 남기니 하나 반 분량이나 될까 싶었다. 채친 양파를 한켠으로 밀어 놓고 이번에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한 알 꺼내와 깎았다. 사과로 유명한 지방에 사시는 배우자의 부모님이 보내 주신 크고 맛있는 사과였다. 사과가 단 만큼 고기도 부드러워지겠거니 싶었다. 껍질을 벗기고 씨를 도려낸 사과를 양파와 비슷한 두께로 나박하게 썰었다.
양파와 사과를 섞어 냄비 아랫면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잘 깐 다음, 이 냄비의 주인공인 삼겹살을 준비했다. 그냥 쪄도 되지만 간을 미리 좀 하는 편이 좋겠어서 작은 볼에 맛술 조금과 된장 한두 숟갈, 통후추 몇 알을 잘 섞은 다음 고기 겉면에 바르고, 양파와 사과가 깔린 냄비 안에 지방이 위로 가도록 놓았다. 고기 위에 월계수잎을 몇 장 올리고, 남은 양파와 사과도 마저 붓고, 대파를 한 대 길게 썰어서 이리저리 놓은 다음, 마지막으로 깐마늘을 한 줌 뿌리고 뚜껑을 닫았다.
물을 따로 넣는 것이 아니라 자체 수분을 이용하는 방법이니만큼 김으로 배출되는 수분도 아끼는 편이 좋았다. 냄비 뚜껑의 김 새는 부분을 키친타올과 알루미늄 호일로 미리 막아 놓았다. 그래도 어차피 밀폐가 아닌 바에야 조금은 새니까, 증기가 폭발할 일까지는 없을 것이었다. 가스불을 약불로 켜고 방치했다. 30분 정도 지나니 집 안에 솔솔 맛있는 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냄비 안을 들여다 보니 어느새 과채즙이 제법 나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불 켠 지 50분쯤이 지났을 무렵 고기를 젓가락으로 찔러 보고, 핏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불을 껐다. 뜨거운 고기를 바로 자르면 예쁘게 썰기가 쉽지 않으니까, 도마 위에 고기를 꺼내 잠시 식히는 동안 쌈장이니, 양파절임이니 하는 반찬을 꺼내 식탁을 차렸다. 한 김 식혀진 고기를 썰려고 손으로 잡으니 비계 부분이 손에 달라붙을 정도로 쫀득거렸다. 이 정도면 먹어보지 않아도 맛을 알 만 하다. 가지런히 썬 고기를 큰 접시에 빙 둘러 담고, 가운데 공간에 마트에서 산 무말랭이 한 봉지를 넣으니 비주얼이 제법 그럴 듯해졌다.
잘 익은 돼지고기가 맛이 없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식탁 위의 그릇들이 말끔하게 비워지는 데는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추위를 뚫고 정육점에 다녀온 보람이 있고말고.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숨을 고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삼겹살 가격만큼의 포인트로 환불이 완료되었다는 마트의 전언이었다. 나쁜 놈들, 내가 배가 불러서 봐 주는 줄 알아라.
정육점의 수육용 삼겹살 1근이 12000원이었다. 아저씨가 썰어낸 양이 600g을 살짝 넘어, 고기는 총 13000원어치
5kg짜리 양파 한 박스를 샀었는데, 몇 개가 들어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대신 마트에서 구입한 3980원짜리 한 망에 5개가 들어 있으니까, 그 가격으로 치면 두 알에 1592원
사과는 선물받은 거라 가격을 계산할 수가 없는데, 마트에서 파는 세척사과 한 알에 990원이니까 대충 800원인걸로 하기로 한다
깐마늘 300g 한 봉지에 3480원, 마늘 한 줌의 무게를 재어 보니 30g이었다. 348원
월계수잎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약 5년 전 자취생일 때 근처 마트에서 한봉다리 산 것을 아직도 쓰고 있어서 가격의 의미가 없지만... 최소단위로 쳐서 6장에 100원
마트 흙대파 한 봉에 2880원인데 6대 정도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한 대는 480원
450g짜리 된장 한 통에 5300원 주고 샀다. 된장 1큰술은 20g 정도라고 하니까 236원
맛술의 마트 가격이 대략 100ml당 500원 정도. 찔끔 넣은 양을 5ml 정도로 잡으면, 25원
통후추를 한 8알쯤 썼나보다. 파는 가격은 10g당 700원 정도인데 계산이 참 곤란하다. 0.5g 정도라고 치면 35원
시판 무말랭이 150g짜리 한 봉지에 2980원
이상 두 명이 배불리 먹은 수육 한 접시에 19596원
일인당 원가가 만원쯤 된 셈이니 집밥치고는 가격이 있는 편이지만, 고기로 잔뜩 배를 채운 풍족함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지는 않다. 식비를 절감하려면 삼겹살 대신 좀더 저렴한 앞다리살 같은 것을 쓰는 방법도 있긴 한데, 가격이 거의 50% 정도 차이나는 만큼 맛도 삼겹살 쪽이 두 배는 좋으니 그때그때 뭣이 중한지에 따라 선택할 일이다.
고기와 후추알, 월계수잎, 대파, 마늘 등을 꼼꼼히 잘 건져내고 푹 익은 양파와 사과, 돼지고기의 풍미가 녹아든 채즙만 냄비에 남겼다가, 다음날 그걸로 카레를 끓여 한 끼를 먹었다. 사실 그것까지 계산에 넣으면 한 끼당 평균 식비는 퍽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