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카뮈가 말하는 <귀멸의 칼날> 아카자의비극

by 인생실험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강인하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사람은 필사적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만다.


1.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세계, 그러나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계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선택해 온 삶’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잠시만 멈춰 돌아보면, 정작 우리의 삶은 선택 이전의 것들로 더 많이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태어날 가정도, 처음 몸을 누이던 공간도, 우리의 첫 번째 표정을 지켜본 사람도 우리가 결정한 적은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의 상황을 ‘던져져 있음’이라 불렀다.


그 말은 마치 한겨울 새벽,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들판으로 갑자기 밀려난 아이가 눈을 뜨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아이는 그저 그곳에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던져짐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세계는 우리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조리’라고 말했다.


부조리란,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간절함과 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하는 세계의 차가운 무관심이 충돌할 때 생기는 틈이다. 우리가 애써 이해 받고자 할 때, 세계가 등을 보이며 조용히 멀어지는 순간. 그 잔인한 틈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얼어붙는다. 던져짐과 부조리는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삶의 원초적인 풍경이다.


2. 아카자, 상처 새겨진 인간의 얼굴


‘귀멸의 칼날’의 아카자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그저 잔혹한 혈귀로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누구보다 슬픈 존재다.


아카자, 본명 하쿠지.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든 아버지, 빈곤과 폭력이 일상인 마을, 희망이라곤 꿈도 꿀 수 없는 세계에 ‘던져져’ 있었다. 그는 선하게 살고 싶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 스승의 도장을 지키고, 약혼자 코유키를 위해 성실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세계는 그에게 아무런 온기도 허락하지 않았다. 도둑질을 하면서까지 아버지를 부양했던 그의 마음은 가족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음에도 세상은 벌써 그를 ‘범죄자’로 낙인 찍었다. 그의 선한 마음은 아무도 보지 못한 채, 그의 손에 묻은 잘못의 흔적으로 그를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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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지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사랑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민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그 손길은 너무 쉽게 바스러졌다. 약혼자 코유키와 스승이자 장인인 케이조의 독살. 그를 이 세상에 붙들어 두던 마지막 끈마저 잔혹하게 끊어져 버린 순간, 세계는 잔인하리 만큼 철저히 침묵했고, 그의 사랑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쿠지는 사랑을 믿었고, 세계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곧 하쿠지의 영혼을 부러뜨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은 사랑을 앗아간다.”
“약한 건 모두 죽는다.”
“강해져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고 자체가 이미 부조리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강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는 인간성을 잃고, 살육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소모했다.


부조리를 마주한 인간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카뮈의 말처럼, 반항하거나 도피하거나. 반항은 나를 살린다. 도피는 나를 파괴한다.


하쿠지는 도피했다. 그는 지켜야 할 대상에 매몰되어, 그들이 지키려 한 의미를 놓쳐버렸다. 상처는 그에게 “강해야 한다”라는 거짓 속삭임을 들려주었고, 키부츠지 무잔으로 대변되는 그 속삭임은 결국 그를 아카자로 만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하나의 바위가 되었다. 끝없이 굴리고 또 굴려야 하는, 그러나 결코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그의 싸움은 이미 목적을 잃은 반복이었다.


3.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비극은 우리에게 묻는다.


“부서진 마음을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가?”


아카자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세계에 던져졌고, 부조리를 겪으며, 상처 속에서 걸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던져진 장소’는 내 인생을 결정 지을 수 없다. 우리가 태어난 환경, 우리가 받아온 상처들은 우리의 출발점일 뿐, 결론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던져짐을 피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누구로 살지는 우리가 선택한다.”


세계가 정한 이름을 그대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주어진 조건이 나를 규정하도록 놔두지 않을 수 있다. 상처받은 아이가 반드시 상처를 반복하는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 하쿠지를 끊임없이 아카자로 묶어두려 한 무잔처럼, 세계는 우리가 바라는 의미를 지독하리만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절망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삶의 상처와 두려움을 품고 살아간다. 선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야 하고 세계는 침묵하며, 사랑과 노력은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카뮈는 말한다.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다.”


세계는 노력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을 수 있다. 세계는 아무 의미도 주지 않는다. 선량함을 무시할 수도 있고, 사랑에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뮈가 내린 결론은 매우 놀랍다. 어떤 환경에 태어났건, 그 환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갈지 선택할 주체는 나다. 그래서 우리는 부조리에 반항할 수 있다. 반항이란 세계가 주지 않은 의미를 내가 스스로 만드는 행위다. 사랑, 성취, 삶의 이유는 세계가 주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내가 원하는 의미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불현듯 닥치는 상실과 부조리에 대해 ‘반항’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이다.”


우리는 아카자처럼 도피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렌고쿠처럼 어둠 속에서도 자기 의미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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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고쿠는 말한다.

“마음을 불태워라.”
“한계를 넘어서라.”
“가슴을 활짝 펴고 살아라.”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함에 아무리 좌절하고 쓰러져도, 마음을 불태우고 이를 악물고 앞을 바라보아라.”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성’,

카뮈가 말하는 ‘반항’,

그리고 귀멸의 칼날에서 렌고쿠가 보여준 ‘의지의 불꽃’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너는 세계에 던져졌지만, 무너지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

“세계는 침묵하지만, 너는 네 의미를 말할 수 있다.”

“상처 받았지만, 다시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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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자는 실패한 인간의 초상이다. 그러나 하쿠지로 죽기를 선택한 아카자는 실패를 극복한 인간의 초상이다. 그래서 아카자는 우리에게 강렬한 교훈이 된다. 그의 비극을 바라보는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내가 던져진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부조리 속에서 어떤 의미를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이 상처 속에서도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이 질문은 결국, 아카자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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