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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Sep 06. 2016

긴 머리카락을 홧김에 잘라버린 날

아무도 무슨 일이 있냐고 추궁하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쌓인 게 아닌 요즘, 무언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나는 충동적으로 머리를 잘라버렸다. 미용실을 가자마자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미용사 언니에게 "단발로 잘라주세요"라고 주문해버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언니는 내가 실연의 아픔에 젖어있으리라 생각했는지 굉장히 살갑게 대해주었다. 실연의 고통 때문에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기분 좋은 서비스와 새롭고 예쁜 스타일, 아주 만족스러웠다. (양쪽이 짝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만...)


일전에 단발병에 걸려 단발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을 적에 친구들이 '안 어울리면 어쩌냐'냐며 말렸었다. 이번에도 미리 말하면 적극적으로 말리고 나설 것 같아, 친구들에게 묻지도 않고 허리까지 내려오던 그 머리카락을 귀밑까지 잘라내 버렸다. 아무런 예고 없이 홧김에 변신을 해버리곤,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 주변인들에게 뿌렸다.


"나 머리 잘랐어."


되돌아온 건 폭소였다. 그건 자른 게 아니라 판 거라며, 버섯이 되어 돌아오면 어떡하냔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기보단 '바보야' 라며 크게 웃어주는 그들. 애정이 담겨있는 욕 아닌 욕에 나도 덩덜아 기분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무슨 일이 있냐며 심각하게 애쓰며 묻기보단 애정을 담아 장난스럽게 던지는 욕 한 마디가 더 정감 있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굳이 캐묻지 않고 조용히 내 머리 스타일의 변화에 대해서만 시끌벅적하게 이야기했다. 옆 광대가 있는데도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려서 놀랐다, 탈모가 있다면서 이제 잘랐냐, 앞 머리는 왜 안 내렸냐, 세상 풍파 다 겪은 초코송이 같다, 못생겼다, 스탠더드 푸들이냐, 등등 별소리가 다 나왔다. 시답잖은 농담에 대꾸하다 보니 나의 신경은 현재의 내 문제가 아닌 나의 머리 스타일로 온통 쏠렸다. 농담을 걷어내니 그들의 짓궂은 목소리는 위로로 들렸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보이는 나의 새로운 머리 스타일 덕분에 내가 어떤 것으로 힘들어했는지에 대한 거북한 생각이 슬금슬금 잊혀갔다. "괜찮아, 잘 어울려"라는 말이 괜히 "괜찮아. 잘될 거야"로 들리는 것 같았다.


힘들어하는 이를 위로하는 방법은 어쩌면 아주 간단한 것일 수 있다. 당장 힘든 일이 생각나지 않게끔 다른 화제을 끌고 오고, 마땅한 화제가 없다면 가벼운 침묵을 지켜주고, 그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아주 가벼운 격려를 해주는 것. 간단하면서도 어렵지만 그의 인생에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두는 대신 가벼운 지지를 보낸다면 금방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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