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만난 그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이 좋다.
동생의 튼튼하지만 좀 개털같은 머릿결을 정리하고자 함께 미용실에 다녀왔다. 강남역 어느 유명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가 쥐 파먹은 것 같은 단발이 되어 돌아온 후부터 우리는 브랜드 네임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수 많은 스타일리스트 중 가끔 덫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똑같은 돈을 내고 덫을 밟는 소비자의 입장은 생각보다 기분 나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사실 그것보단 나의 양쪽 짝짝이 단발을 거울로 확인하는 게 더 열받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구경하던 동생은 미용실 선택의 중요성에 대하여 통감했는데, 그보다는 긴 머리에는 함부러 가위질을 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부터 얻은 것 같다. 물이 다 빠져 빛 바랜 황금 색상 머리칼보다는 대책없이 휘날리는 생머리를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과 나의 모습이 중첩되더니 고민 없이 "펌만 할래"라고 했다. 블로그를 하는 동생에게 마침 헤어숍(흔히 말하는 미용실) 초대권이 왔고, 머리 스타일을 정리하고 싶어하던 소망이 점점 커져가던 상황이기에 동생은 주저없이 방문하기로 예약을 잡았다. 나와는 별 인연이 없는 동네 건대입구역. 동생은 많이 와서 익숙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공간인 그 동네에서 동생은 머리를 맡겼다.
시간이 넉넉하게 도착했다. 건대입구역 1번 출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금방 찾았다. 회색 빛깔이 지배적인 미용실 분위기는 유럽 어느 거리 구석에 있는 오래된 이발소 같았다. 사람 좋은 흰 수염 할아버지 대신 검은 머리 아저씨가, 면도날 대신 가위가, 마사지 대신 클리닉이 있는 이발소.
눈이 아프도록 휘황한 조명이나 부담스러운 전신 거울 대신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듯 무채색 의자와 회색 선반, 상반신 거울과 적당히 조도가 높은 조명이 자리했다. 계산 카운터는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아주 작았고, 회색 빛과 잘 어울리는 단순한 검은색이었다. 원장님께선 동생의 머리를 힘 있고 능숙하게 만지시며 "어떤 스타일로 해드릴까요?" 물었다.
"펌만 해주세요."
블로그 체험단으로 가서 시술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동생은 컷을 포기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원장님께선 "그냥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예쁘게 나와야 우리도 좋지."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곧 섬세하게 컷을 해주셨고, 그것으로 동생의 변신은 시작됐다.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가위질 소리, 적당히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대화가 떠다녔다. 펌이 시작된 후 머지않아 원장님의 부인께서도 오셨다. 원장님처럼 꾸밈 없고 소탈한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둥근 얼굴과 네모난 안경, 무채색에 가까운 녹색 상의와 검은 바지, 둘러맨 미용 도구, 작은 키, 선한 눈빛과 약간 콧소리가 섞인 말투가 미용실의 따듯한 회색과 닮아 있었다.
같이 온 저 분은 친구냐는 물음에 동생은 "세 살 터울 나는 친언니"라며 웃어보였고, 화장기 없는 그 수수한 척 퀭한 나의 얼굴이 왠일인지 예쁘게 느껴졌다. 와, 나 20대 초반처럼 보이나봐! 흔한 립서비스임을 알면도 들떴다.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리며, 알랭 드 보통이 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책을 모두 읽었다. 술술 읽히기도 했고, 현학적인 그의 문체가 그다지 낯설진 않았기 때문에 (당시 그가 책을 집필할 당시 나이가 놀랍게도 25살이었다. 그의 현학적인 자세는 어린 날의 치기로 느껴져서인지 정겹다) 더 빨리 읽힌 것 같다. 조용히 돌아가는 펌 기기의 소리와 가위질 소리, 회색 빛깔 벽과 부드럽게 미끌거리는 바닥, 와인색 쿠션을 안고 물끄러미 거울 너머의 자기 모습을 지켜보는 동생, 책을 읽고 있는 나,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마침내 동생의 머리는 모두 완성되었다. 우아하고 굵은 웨이브가 들어갔고, 머리 숱은 정돈되고 부드러워졌다. 나중에 또 와달라는 부부의 말은 흔히 듣는 인사보다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또 돈 쓰러 꼭 우리 가게에 들러주세요'가 아니라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또 와서 재미있게 얘기해요' 같은 따듯한 느낌.
아무런 가식과 꾸밈이 없는 그 단촐한 가게.
손님에게 억지로 잘 보이려는 가식보다는 정말로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모습.
특별한 사연과 사건이 없는 데도 그들에게서 풍겨나오는 그 인간적인 분위기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참 따듯하고 포근했다. 펌을 하러 가면 색깔도 바꾸라는 둥, 클리닉도 받아야 한다는 둥 돈을 위한 제안이나 조언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그 진심이 보였다. 이런 따듯한 곳을 만난 게 참 너무 오랜만인 것 같다. 동생의 머리에는 그들의 성격 같이 너무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적당한 웨이브가 예쁘게 자리잡았다.
내 머리도 맡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