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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여행가 Sep 25. 2024

인생여행의 시작은 실크로

No. 3

장기간 오지 여행의 시작

대학교 1학년 때 얼떨결에 아빠가 부추겨 유럽여행을 한 달 다녀온 후 2학년 때 혼자 태국,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갔고, 3학년이 되자 자신감이 어느 정도 생겨 실크로드(베이징- 시안- 가욕관 - 난징 - 둔황- 투루판 - 우루무치 - 카쉬가르) 와 티베트로 목적지를 정했다. 


당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가?" "나의 생의 숙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가득했던 나는 초기 불교 지역을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중국어라곤 "니하오" 밖에 못하는 나에게 중국이란 대륙은 거대하면서도 무서운 존재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뭐 죽기야 하겠어?"라는 정신으로 "그래도 가보자"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아 당시 거의 유일하게 있었던 <백패커스 네트워크>에 실크로드와 티베트를 같이 가자고 글을 올렸다. 


그 시절 백패커스 네트워크를 아시나요?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라테는...) 이제 막 인터넷이라는 세상이 펼쳐진 때였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야후 코리아가 막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니 말이다. 

그 당시 지금의 네이버 카페 같은 개념의 여행 인터넷 동호회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백패커스 네트워크>였다. 지금처럼 커뮤니티가 활발하지 않았고, 그러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유랑> 카페에서 여행 동반자를 구하는 정도였다. 

그곳에서 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충남대 기영 언니를 만났다. 착하고, 배려심 많던 언니를 만났던 건 참 행운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우리는 참 순수했고, 무모했고, 즐거웠다. 심지어 언니는 나처럼 중국어 한 마디 하지 못했고 여행도 처음이었다. 

부산과 대전에 살았던 우리는 출발 당일 10kg 배낭을 메고 공항에서 만나 그 후로 2달이 아닌 3달가량 함께 보냈다. 


그래도 말은 통했지요. 어떻게는 모르겠어요.... 

2000년 베이징은 올림픽 전이었고, 3환이 막 개발된 참이었다. 한국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베이징의 왕징이 5환인데, 아직 개발도 되기 전이었다. 외국인은 드물었고, 영어는 무용지물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우리에겐 만국 공통어, 보디랭귀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손짓, 발짓을 하고, 지도를 눈알이 빠져가게 쳐다보며 (둘 다 길치였다...) 그렇게 다녔다. 

그래도 먹고는 다녀야 하는데, 베이징은 우리에게 충격이었다. 

야채볶음을 시키면 기름에 둥둥 떠다니던 야채 쪼가리에 끔쩍 놀라고, 메뉴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로 처음에는 만두를 먹었다. 7월에 여행을 갔는데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한 번은 돼지고기만두를 입에 넣었다 구역질을 하고는 만두는 그날로 제외하고 아침에는 길거리 줄, 튀김 빵, 과일 등을 먹었다. 특히 당시에 수박, 하미과를 그렇게 먹었는데 지금도 기억난다. 하나 1위엔도 안 했는데 과육이 줄줄 흐르고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 시절 하미과가 그립다. 다행히 베이징을 지나 시안부터는 음식이 조금 담백해져서 우육면을 주식으로 하고, "계란 토마토 볶음- 시홍스지단"을 영혼의 음식 삼아 다녔었다. 


말은 안 통하는 게 당연한데... 정말 신기했다. 

아직도 그 시절 기억이 나는 게 나는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맛있어요?" 그러면 아저씨는 "블라블라,,, 블라블라..." 하는 거다. 그러면 서로 알아듣고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그랬다. 심지어 십분도 대화를 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대화를 했지? 생각해 보면, 그게 '이심전심'인가 싶기도 하고 그냥 신기한 경험이었다. 


중국에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화장실 문이었다. 

화장실 문이 딱 두 번째 도시였던 시안의 기차역까지 있었고 그 뒤로는 화장실 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베이징에서도 화장실에 있는데 자꾸 아줌마들이 문을 열고 서로 대화하면서 볼 일을 보셔서 당황하였는데, 도시를 지나갈수록 화장실 문이 없는 거였다. 아니 화장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시안을 넘어가면서 가욕관 같은 시골 동네에서도 며칠을 묶었는데 점차 화장실은 옆에 문이 있고 앞사람 엉... 이를 봐야 하는 구조였고, 그 뒤에는 아예 옆에 문도 없이 텅 빈 공간에 동그란 구멍만 일렬로 뚫려 있었다. 

당시 매일 일기를 쓰진 않았는데 오랫동안 똥 밟고 서러웠던 일기를 보관하였었다. 

신장 위구르 지역인 우루무치에서 카쉬가르로 가는 밤 버스에서 2층에서 신발은 비닐에 넣고 접혀서 자는데, 갑자기 밤에 내리라고 해서 깨우더니 "흩어져" 하는 거다. 얼떨결에 칠흑 같은 밤에 밭 한가운데서 흩어졌다 다시 버스에 올라 신발을 비닐에 구겨 넣고 잤는데 자꾸 향기가 나는 거다.

다음날 새벽에 내려 보니 아휴....

카슈가르 숙소를 잡고 바로 화장실에서 쭈구려 앉아 오물을 씻는데 정말 씻어도 씻어도 떨어지지 않던 그 오물들이 내 힘든 여행과도 같아 보여 혼자 욕을 하다 울어 버렸었다. 

그러고 어쨌냐고? 

털고 일어나서 밥 먹으러 갔다. 하하...


오늘의 일을 내일을 미루지 말고, 다음은 없다. 

여행을 하면서 다음에 봐야지 하고 10년 이상 그 기간이 미뤄진 적이 많다. 

두 번째 갔던 태국, 말레이시아 여행에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2000년 여행에서 계획했던 윈난성을 2016년에야 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예 여행 루트를 변경한 것이 아니라도 오래 머무르면서도 빠뜨린 것들이 있는데 그게 만리장성과 그레이트 오션 로드였다. 2000년 여행을 시작하면서 북경에서 거의 일주일을 보냈는데 북경이 워낙 크기도 했고, 말도 통하지 않은 상태라 에너지 소비가 많긴 했다. 우리의 비행기표가 실크로드를 돌고 티베트를 다녀와 북경에서 아웃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북경에 돌아와서 가자며 일정을 미뤘다. 

북경을 다시 간 것은 신랑이 회사에서 1년 학교를 보내주어 북경에 주재할 때였고, 이후 중국 주재원으로 혼자 가있을 때 여러 번 가면서 그때서야 만리장성을 가게 되었다. 결국 2000년에 가고자 했던 만리장성을 14년 뒤에 가게 된 것이다. 


여행에서처럼 우리 삶은 언제나 일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늘 생각한 것을 내일로 미루었을 때 그 기회는 날아가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20대 초입 여행에서 배웠다. 

하루하루 알차게 사는 것, 하루하루 행복을 찾는 것을 미루지 말아야지... 오늘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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