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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산 Dec 29. 2019

아침 4시 출근, 밤 12시 퇴근, 월급 100만 원

종로에서 토익 강의를 한다는 건 1.0

Night With Stars, emojipedia.org

2008년 12월, 내 인생의 첫 토익 강의 일정이 잡혔다. 그것도 공개특강으로. 학원 수강 여부와 상관없이 신청만 하면 들을 수 있는 무료 공개특강이었고, 강의실은 약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다. 사회생활을 미리 경험한 친구들은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다며 초장부터 학생들의 기를 눌러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 토익강사 가이드북과 같았던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을 쓰신 스타 토익강사 유수연 선생님도 독설 카리스마로 유명해졌다. 나를 태어나서 처음 볼 사람들에게 내 안에 있지도 않은 강하고 쎈 이미지를 쥐어짜서 끌어모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메이크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올리브영에서 스모키 메이크업 도구들을 구비했다. 내 의지로 나의 메이크업을 위한 도구들을 구매한 것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정말 처음이었다. (특수한 상황이란 졸업앨범이나 프로필 사진 촬영과 같은 일회성 행사를 뜻한다.) 의상도 독한 카리스마가 풍기는 스타일로 입어야 했기 때문에 후드티만 가득한 내 옷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여성복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고, 그걸 내가 빌려서 무기한, 무제한으로 입을 수 있게 허락해줄 사람은 단 한 명, 엄마였다. 엄마의 재킷과 자라의 미니스커트, 그리고 올리브영의 스모키 메이크업 도구는 세상 물정 모르는 물렁물렁한 스물넷 사회초년생을 카리스마가 넘치는 서른넷 독설 토익강사로 만들어주었다.


이제 외적 메이크업은 준비 완료되었으니 내적 카리스마를 만들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강의할 LC에 대해 자신감도 없었을뿐더러 그때 당시 LC 점수도 만점이 아니었다. 495점 만점에 아마 450점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점수도 어떤 특별한 학습법을 통해 받은 점수라기보다 그냥 듣고 푼 것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스물넷 예비 토익강사였던 나는 듣기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그냥 들릴 때까지 계속 듣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결론적으로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내가 LC에 대해서 뭘 알아야 내적 카리스마든 독설이든 내뿜을 수 있을 텐데, 실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안타깝게도 내적 카리스마를 만들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LC 점수를 효과적으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각 파트별 특성을 파악하고, 토익에서 빈번하게 출제되는 표현들을 눈과 귀로 익히고,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는 표현은 입으로 따라 하면서(보통 쉐도잉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체화시킨다. 이렇게 자신의 약점을 찾아서 공략한다면 정말 누구나 다 토익 LC 만점 받을 수 있다. 하지만 10년 전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드디어 특강의 날이 밝았다. 무료특강이다 보니 정말 많은 학생들이 신청했다. 100석 규모의 강의실이었는데도 의자가 모자랐다. 외적 카리스마는 충만했지만 내적으로는 강의실에 앉아있던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던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교단에 올라 열심히 준비한 강의를 선보였다.

나는 비교적 실전에 강한 편이다. 고등학교 때 그 어떤 시험보다도 수능을 제일 잘 봤고, 대학교 때 교내 카트라이더 대회에서 4등을 했다.(연습량에 비하면 엄청난 결과인데, 나는 아직도 골인 지점 직전에 맞은 물풍선이 천추의 한이 된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1등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온몸은 덜덜 떨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말이 끊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스모키 메이크업과 엄마 재킷 덕분에 학생들도 꽤 집중하는 것 같았다. 특강이 끝나고 선생님들과 학원 관계자분들이 처음 한 것 치고는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잘 나왔다.

이제 나는 진짜 토익강사가 된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토익의 메카 '종로'에서!


학원에서는 어느 선생님과 나를 한 팀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LC, 듣기 영역이었고 그 선생님은 RC, 읽기 영역이었다. 우리 팀은 '테스트와이즈 어학원' 이름에 맞춰 '와이즈 토익'으로 결정되었다. 나와 함께 팀을 이룬 B 선생님은 나보다 7살 정도 많았고 영어 강의 경력을 많았지만 토익 경력은 많지 않았다. 학원에서는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학원 이름으로 팀명을 정해준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부원장님과 실장님은 다른 팀들보다 우리를 좀 더 밀어주었다.(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원장님은 없었다. 처음부터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항상 없었다.) 학원에서는 우리에게 여러 특혜를 주었는데, 그중 가장 컸던 건 급여였다.


학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10년 동안 경험하고 들은 토익학원 급여는 전부 비율제다. 수강생의 수만큼 정해진 비율로 강사와 학원이 나눠갖는다. 강사는 원천징수 3.3%를 제한 나머지를 전부 받기 때문에 매달 4대 보험료를 내야 하는 직장인들은 이 부분에서 강사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강생의 수만큼"이라는 대목이 중요하다. 수강생이 0이면 급여도 0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학원에서 많이 가져간다. 물론 학원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학원 6: 강사 4의 비율이고, 경력이 많지 않은 선생님들에게는 학원 7: 강사 3의 비율로 계약을 한다.

여기서 잠깐 돈 계산을 해보자. 토익 수업 1개월 수강료를 20만 원이라고 쳤을 때, 이번 달 수강생이 1명이면 학원은 12만 원을, 강사는 8만 원을 가져간다.(세금계산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10명이면 80만 원, 100명이면 800만 원이다. 물론 월 수강생이 1000명일 수도 있다. 넓은 강의실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 7일로 강의하면 1000명은 물론 2000명도 가능하다.(300석 강의실에 토요반, 일요반도 다 하면 정말 가능한 이야기다.) 월 2000명이면 급여는 1억 6000만 원이고 연봉은 19억 2000만 원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사계절이 가기도 전에 과로사할 것이다.


다시 2009년의 테스트와이즈 어학원으로 돌아와서.

학원에서는 우리에게 비율제가 아닌 학생 수와 상관없이 강의한 시간에 따라 급여를 주는 시급제로 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고 2개월 동안은 학원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학원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학원에서는 김우산 강사가 아닌 와이즈 토익이라는 팀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팀명(강좌명)은 강사의 이름이 많이 들어갔었고(예를 들어, 김우산 선생님이라면 '우산토익', 김우산 선생님과 홍길동 선생님이라면 '우동토익' 이런 식이었다.) 그 수업이 유명해지면 학생들은 학원보다 팀을 따라다녔다. 학원을 보고 수강신청을 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 이름을 보고 수강 신청을 하는 것이다. 결국 선생님들이 학원보다 더 큰 권력을 갖게 되고 약간의 갑질을 부리다가 다른 학원으로 옮기는 사례가 빈번했고, 그런 이유로 학원은 선생님의 이름이 바뀌더라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수업을 원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우연찮게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 혜택 아닌 혜택으로 나와 B 선생님의 첫 2개월 급여는 수강생이 몇 명 안 되는 초보토익강사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2009년 2월에 받았던 첫 급여는 2,715,440원이었고, 3월에는 2,069,970원이었다.

4월 즈음 팀의 변화가 있었다. 기존 와이즈 토익 시스템은 나와 B 선생님이 맡고 있던 기본반과 C, K 두 분의 선생님들이 맡던 심화반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C와 K 선생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팀이 깨지고 K 선생님은 학원을 떠났다. 그래서 결국 와이즈 토익은 3인 체제가 되었고 담당 영역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LC에서 독해로, B 선생님은 RC에서 LC로, 그리고 C 선생님은 심화반 RC에서 문법으로.


사실 담당 영역이 바뀌게 된 건 K 선생님의 퇴사도 있지만, 나의 LC 강의력 부족도 한몫했다. 나는 LC 강의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고, 특별한 교수법도 개발하지 못한 채 그저 교재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읽어주기 밖에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강생으로부터 아주 신랄한 강의평가서를 받았다. 학원 실장님은 그 강의평가서가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학생이 쓴 평가서 원본을 나에게 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평가서에는 "학원에서 수업을 듣느니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었고, 너무 화가 난 나는 강의실 구석에서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조용히 분노의 눈물과 콧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얼마 후, 퇴사한 K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그 선생님과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선생님은 아니었는지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알고 보니 그 근처 옷가게에서 교환할 옷이 있었는데 온 김에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했다. 우리는 의류 교환을 하고 난 후 청계천을 걸으며 자연스레 학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가 LC 수업이 정말 어렵고 수강생 평가도 안 좋게 나왔다고 하니 K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봐도 토익 강의가 선생님이랑 안 맞는 것 같아. 선생님은 컴퓨터 잘하니까 출판사 같은 데 들어가 보는 건 어때?"

그 말을 듣고 난 정말 화가 났다. 나는 누군가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못한다는 평가를 하면 화가 정말 많이 난다. 당연히 못하는 건 못한다고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아마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걸 몰라준다는 억울함과 오만하고 거만한 성격 탓일 것이다. 여하튼 그 분노의 순간에 결심한 게 하나 있었다. 인정받는 토익강사가 될 때까지 절대 그만두지 않기로. K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나는 그만두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참고 견디며 계속 토익 강의를 할 수 있었다. 그 선생님 덕인지,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3인 체제가 된 와이즈 토익의 첫 달 성적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한 수업인데 선생님은 셋이라서 급여를 3으로 나눠야 했기에 급여가 전달에 비해 반으로 떨어졌다. 2009년 4월 급여는 1,005,050원이었고, 그다음 달은 961,890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할 일은 태산 같았다. 내가 맡은 독해는 긴 지문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업 준비와 강의만으로 하루가 다 갔다. 어떤 달은 아침 6시 30분 반에 학생 1명이 수강신청을 했다. 선생님 3명에 학생 1명이라니, 우리는 학생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 반을 폐강하려 했지만 그 학생의 일정상 그 시간에만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꼭 이 반을 듣고 싶다면서 우리에게 수업을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런 학생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 셋은 그 한 명의 학생을 위해 매일 6시 30분에 출근을 했다. 어떤 날은 그 학생이 늦잠을 자느라 학원에 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김포공항 근처에서 승무원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종로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4시에 일어나 학원에 출근했는데 수업을 할 학생이 오지 않았을 때, 정말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저녁 수업이 있는 월수금요일은 밤 10시에 끝났고 집에 오면 12시였다. 화목요일은 학원에서 수업 준비까지 다 하고 나면 7시쯤 끝났고 토요일은 보통 특강을 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일했다. 함께 살던 승무원 친구와 누가 더 일 많이 하는지 겨뤄본 적도 있었다. (내가 이겼다)


어느 일요일에는 학원에서 수업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학원에서 강사실과 복사실을 왔다 갔다 하며 수십 권의 토익책과 HP 노트북과 함께 수업 자료를 준비했다. 자료 준비를 마친 후 집에 가려고 학원을 나가는데 건물 정문이 잠겨 있었다. 내부여도 열쇠가 있어야 열리는 문이었다. 관리실도 텅 비어있었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나가는 문이 보이질 않았다.


건물에 갇혔다!


영화 '다이하드' 1편의 브루스 윌리스가 된 느낌이었다. 물론 악당은 없었지만. 시간은 벌써 오후 4시였다. 어떻게든 건물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여기서 잘까? 어차피 내일 새벽에 또 나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머리는 감아야 하니까 집에 가야만 했다. 다행히 지상 주차장으로 가는 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브루스 윌리스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입구 근처의 주차장 담이 내 키의 두배 정도였는데 그 밑에 나를 위해서인지 쓰레기통이 준비되어있었다. 나는 쓰레기통을 밟고 올라가 주차장 담을 넘어 드디어 그 건물을 빠져나왔다. 내 발이 길바닥에 닿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신기하게도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비슷한 기분이 든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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